서 론
코는 인간의 얼굴에서 가장 중앙 부위에 있으면서 가장 돌출된 기관으로, 코에 대한 연구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코는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화 과정에서 뇌를 배출하는 통로로 사용되었고, 중세시대까지 호흡기관이자 뇌의 악령이나 노폐물을 배출하는 기관으로 인식되었다. 17~19세기를 거치며 해부학과 생리학 분야의 지식이 축적되었고, 20세기에 나타난 과학기술의 폭발전인 발전으로 인하여 영상 진단과 수술 기법에서 괄목할 성장을 이뤄냈다. 개방적 접근에서 내시경적 접근으로 이행되면서 과거보다 기능적이고 보존적인 수술이 가능해졌고, 환자의 삶의 질에 큰 진보를 제공하였다.
코는 호흡, 점액섬모수송, 온도조절, 가습, 감각기, 면역작용, 여과, 반사 및 후각 등 다양한 기능을 하는 중요 기관으로, 오늘날 비과학은 염증반응과 관련된 분자생물학, 알레르기와 관련된 면역학, 부비동 감염과 관련된 미생물학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임상적으로는 신경외과, 안과와 치료 범위를 공유하면서 적응증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본 종설에서는 비과학이 인류 역사와 함께 걸어온 흥미로운 발자취와 향후 전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시대별 발전 과정
고 대
코와 부비동 질환을 다루기 위한 노력은 인류 역사 초기부터 시작되었다(Fig. 1). 이집트 파피루스에는 미라의 방부 처리과정에서 경비적 접근을 통해 갈고리 형태의 기구를 이용하여 뇌를 추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Fig. 2) [1-3]. 이를 통해 당시 이집트인이 뇌, 사골천정 및 사상판의 구조적 관계를 파악하고 있었으며 부비동수술의 선구자임을 유추할 수 있다. 기원전 3,500년 이집트인 Sekhet’enanch는 인류 역사 최초의 내과 의사로 파라오의 수행자였으며 “왕의 콧구멍을 치료했다”는 내용이 파라오의 무덤에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4,5].
기원전 6세기초 인도 의사 Sushruta가 저술한 Sushruta Samhita에서 처음으로 비강 검사가 등장하며 편도와 비용을 제거하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비경인 Netiyantra를 언급하였다[2]. Sanskrit Atharvaveda는 다양한 두경부 질환에 관한 정보와 치료 성과가 언급된 문헌으로 뺨이나 이마로부터 국소 피판을 사용하여 코를 재건하는 방법을 기술하였다[6,7].
기원전 460년 고대 그리스의 코스섬에서 태어난 Hippocrates는 “의학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당시 군인과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운동선수에게 코외상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Hippocrates는 외상의 정도를 여러 단계로 평가하였으며 골절 부위에 따라 상부, 하부, 연골, 비골 및 복합골절로 분류하였다. 10일 안에 골절의 치유가 이루어지므로 외상 후 24~36시간내 도수 정복술을 시행하고 비강내 충전재 삽입을 권고하였다. 외비기형이 동반된 경우 카르타기니아 가죽으로 만든 끈을 외비와 측두엽에 접착제를 사용하여 고정시켜 정복을 시행하였다[6]. Hippocrates는 비용을 제거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소개하였으며 Voltolini [8]의 교과서에 따르면 이 방법은 10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스폰지에 여러 개의 끈을 묶고 끈의 한쪽 끝을 비강을 통해 비인두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유연한 프로브에 고정한 상태에서 프로브를 잡아당겨 스폰지가 콧구멍을 가로질러 가게 하여 비용을 함께 제거하였다(Fig. 3). 섬유화된 비용에 대해서는 올가미의 원리를 이용하여 제거하였으며, 소작에 뜨거운 철을 사용하였고, 출혈과 유착 방지를 위해 가성 분말(caustic powder)을 국소적으로 적용하였다[9]. Hippocrates의 술기가 현재 시행되고 있는 많은 치료법들과 유사점을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세기 로마의 귀족인 Aulus Cornelius Celsus는 8권의 의학백과사전인 De Medicina에서 코는 중앙의 뼈로 분리된 두개의 통로로 하나는 호흡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각을 인지하는 뇌로 가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2]. 비용을 치료하기 위해 가성 물질을 도포하거나 주걱 모양의 기구를 이용하여 기시부로부터 분리시킨 뒤 최종적으로 훅(hook)의 형태를 가진 기구로 병변을 제거했다[10].
131년 소아시아(베르가마, 현재의 터키)에서 태어난 Claudius Galenus는 Galen으로 더 알려져 있다. 코를 상부 호흡기의 시작이자 외비와 연결된 근육을 콧구멍의 팽창기로 묘사했으며, 코질환을 취비증(ozena)과 비용 두 가지로 분류했다. 부비동내 점액은 뇌와 뇌하수체에 의해 생성된 뒤 코로 방출되며 코카타르를 “뇌의 배기물질”이라고 설명하였다[11].
중 세
중세의 비과학자들은 부비동의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 세심한 해부실습과 임상관찰을 시행하였지만, 고대부터 이어진 근거 없는 미신들은 여전히 널리 퍼져 있었다[10]. Hippocrates가 코의 해부학적 용어를 정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15세기가 돼서야 코의 구조물들이 확실히 정립되었다. Leonardo da Vinci(1489년)가 그린 그림에서 부비동 뿐만 아니라 비갑개도 확인할 수 있으며 George Thomas (1536년)는 저서 Anatomiae pars prior에서 중비갑개의 뒤측 기시부에 대해 처음 언급하였다(Fig. 4) [12-14].
중세까지 학자들은 부비동이 안구 운동을 위한 윤활유를 보관하는 장소 또는 뇌 속 악령들의 배출구와 같이 기이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스페인의 Sansovino(1550년)는 부비동을 “뇌의 하수구(la cloaca del cerebro)”로 명명하기도 했다[11]. 해부학 의사였던 Andreas Vesalius는 De Humani Corporis Fabrica(1543년)에 기존의 통념에 반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상악동, 전두동 및 접형동에는 공기 밖에 들어있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후비공을 명명하였다[11,15]. 또한 부비동은 두개골의 무게를 감소시키고 발성에 기여한다고 설명하였다[16].
코성형수술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룬 최초의 책은 1597년에 출간된 “코성형술에 대한 조약(Treaty on rhinopasty)”이며 저자인 Gaspare Tagliacozzi는 비피라미드 위로 회전 피판을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17].
중세시대 동안 코카타르는 “뇌의 배출물”로 여겨졌으며 현재 사상판이라고 불리는 뼈의 구멍을 통해 뇌의 점액이 스며든다고 생각되었다. 17세기경 윌리스환(circle of Willis)을 명명한 신경과학자 Thomas Willis는 신경액이 뇌에서 분비된 뒤 말초신경에 의해 신체의 다른 기관으로 운반되며 이 액체가 점막내 관구조를 통해 코로 분비된다고 주장했다[18]. 독일의 Conrad Victor Schneider는 저서 Liber de osse cribriformi(1655년)에서 후각에 대한 원리를 설명하였다. 비강과 뇌실 사이에는 통로가 존재하며 사상판 코점막에 위치한 후각신경 말단이 인지한 정보가 이 통로를 통해 뇌로 전달되어 후각을 인지한다고 설명했다. De Catarrhis(1660년)에서는 비강내 분비물이 두개강이 아닌 코점막 자체에서 분비된다는 획기적인 발견을 기술하였다. 하지만 이 놀라운 발견이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기까지 200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19,20].
영국의 Nathaniel Highmore는 해부학자로 최초로 상악동을 발견하고 그린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상악동은 오랜 시간 동안 Highmore’s antrum으로 불리게 되었다. Highmore는 자신의 그림(1651년)에서 상악동 외에도 전두동과 사골동을 묘사했으며, 발치 후 발생한 구강상악동루에 대해 기술하여 훗날 상악동 수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901년에 발견된 Leonardo da Vinci의 그림(1489년)이 시기상으로는 Highmore의 그림보다 이전에 그려졌지만 이미 Highmore’s antrum이라는 표현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그 명칭은 널리 사용되었다[16]. 영국의 Drake와 Cowper (1707년)는 상악동내 화농으로 인해 구취증을 호소한 환자들에게 발치를 시행한 뒤 발치 부위를 통해 상악동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Jourdain(1765년)은 중비도를 통해 상악동의 자연공에 세척을 시행했다[6,11]. Lamorier(1743년)는 치조와을 통해 상악동을 배농시키는 술기를 시행했으며 이후에도 오랫동안 관습적인 치료로 사용되었다[11,21].
19세기
이 시기에는 Caldwell과 Luc 등에 의해 상악동 접근법이 체계화되고, Emil Zuckerkandl에 의해 개구비도의 병태생리학적 중요성이 발견되었다. 큰 진전 없이 정체되어 있던 코 성형술도 의학적, 예술적 근거를 확립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Deschamps [22]는 후각과 부비동을 독립된 실체로 다룬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비용을 진균성, 혈관성, 점액성, 림프성, 경화성 및 육종성으로 세분화했고, 치료로 수술용 칼, 겸자, 매듭 있는 실, 은선, 화학적 가성 및 국소 향약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6]. Philipp Bozzini(1806년)는 최초로 내시경을 발명한 인물로 코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큰 영향을 주었고, Czermak(1858년)은 “비내시경(rhinoscopy)”을 명명하고 전파하였다(Fig. 5) [23].
1840년대 Dieffenbach를 포함한 코성형술의 개척자들은 외비기형을 치료하기 위해해서 콧등을 덮는 이마 매몰 피판을 적용했으며, Langenbeck(1842년)은 최초로 비중격 연골과 뼈의 돌출을 능와 극으로 묘사하였다. 코성형술의 대표적인 선구자인 John Orlando Roe는 1887년에 “간단한 수술에 의한 들창코의 교정(The deformity termed “pug nose” and its correction, by a simple operation)”을 발표했고 이는 현대 비내 코성형술을 다룬 최초의 기록이다. 주먹코 교정에서 널리 사용되는 경연골 접근법은 그의 연구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어서 1891년에 “피하 수술을 통한 각진 코의 교정(The correction of angular deformities of the nose by a subcutaneous operation)”을 출간하였으며, Weir와 함께 비첨성형, 비혹제거, 비익절제 등 현대 비내성형술에서 사용되는 술기들을 대중화시켰다[24,25]. Asch는 당시 흔히 시행되던 비중격절제술을 시행 받은 환자에서 크기가 큰 비중격천공이 자주 발생하는 것을 관찰한 뒤, 비중격을 절제하기보다는 만곡을 교정할 것을 권고한 최초의 인물이다. 1890년 비중격을 골 절시켜 위치를 재조정하였고 십자형 절제(cross hatch resection)를 제안하였다.
미국의 Caldwell(1893년)은 견치와의 점막을 절제하여 상악동에 접근한 뒤 하비도벽에 큰 개구부를 만드는 수술법을 개발하였고, 독일의 Boenninghaus(1896년)는 Caldwell의 방법에 더하여 부비동 입구를 덮을 수 있는 점막 주름을 만들어냈다. 프랑스의 Luc(1897년)은 Caldwell의 발견에 대해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와 동일한 외과적 접근법을 만들었다[11,21]. 1900년까지 수십년 동안 Grunwald, Hajek과 Onodi의 연구에 의해 외과적, 해부학적 지식은 발전하였고 그들로 인해 비부비동 병변의 현대적인 진단과 치료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해부학자 Emil Zuckerkandl은 현대 비과학의 해부학과 생리학적 지식의 기반을 다진 인물로, 1892년에 개구비도단위를 설명하기 위해 반월열공, 사골누두 및 사골포를 처음 명명했다. 생리적 비중격 만곡증(physiologic septal deviation)을 기술하였으며, 접형동 후비공 비용과 비순낭종 환자를 최초로 보고하였다[26].
근 대
비과학은 항생제의 등장으로 인해 1930년대부터 1950년 대까지 침체기를 겪었다. 감염성 질환의 외과적 치료 필요성이 현저히 감소하였고, 비과학에 대한 관심이 후두학과 이과학으로 이동하면서 해당 학문이 급격히 발전하였다. 당시 비과학의 범위는 비중격만곡증 교정, 비골 외상 정복, 비용 제거 및 견치와를 통한 상악동 배농에 국한되어 있었다[11,20].
20세기 중반 이후 현미경의 사용은 비강 수술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내시경과 영상 진단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비과학은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마취제의 발달로 인해 장시간의 복잡한 수술이 가능해지면서 새로운 수술 방법과 기구의 개발이 끊임 없이 나타났다.
수술 방법의 발전 과정
비중격성형술
비중격수술의 역사는 1900년대 초 Freer [27]와 Killian [28]에 의해 시작되었다. Freer [27]와 Killian [28]은 점막하절제술을 정의하였으며 이는 현대 비중격성형술의 초석이 되었다. 점막 연골 피판을 들어올리고 비중격의 연골부와 골부(서골, 사골수직판)을 제거하되 지지를 위해 미부와 배부를 각각 1 cm 씩 남겨둘 것을 권고하였다.
Metzenbaum과 Peer는 최초로 비중격 미부의 교정을 시도한 인물이다. Metzenbaum(1929년)은 전통적인 점막하절제술이 미부 교정에 있어 효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swing door 기법의 적용을 권고했으며, Peer(1937년)는 비중격 미부를 꺼내어 곧게 만든 뒤 정중선에 재배치할 것을 제안했다.
Maurice H. Cottle은 지난 수십년간 “세기의 비과학자”로 묘사될 정도로 역사적인 인물이다. Cottle(1947년)은 반관통절개(hemitransfixion incision)와 보존적 비중격 절제를 제시하였고, 연골 자체의 탄성에 의한 만곡을 해결하기 위해 쐐기 절제, 전층 절개 및 분쇄법을 제안하였다. 또한 비중격 연골과 사골동 뼈를 이용한 강화 이식(batten graft)을 오목면에 적용하였다. King과 Ashley [29]는 체외 비중격성형술(extracorporeal septoplasty)을 시행하였다. 개방적 접근을 통해 양측 점막 피판을 모두 거상하였으며, 전체 비중격 연골을 분리한 뒤 다듬어 새로운 L-strut을 제작한 뒤 재배치하였다. 연골 1개로 새로운 비중격을 만들기 어려운 경우 여러 개의 연골 조각들을 봉합하였다[30].
비중격성형술에서 비내시경은 Stammberger 등[31]과 Lanza 등[32]에 의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내시경을 사용할 경우 전통적인 수술법에 비해 만곡의 정도를 시각화하기 용이하고 관찰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 따라서 비중격의 후방, 극, 수포성갑개 및 후비공을 포함한 국소 영역을 조작할 수 있으며, 내시경 부비동수술과의 전환이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 내시경 비중격성형술의 치료 효과에 대한 연구에서 비폐색 개선, 합병증 및 삶의 질 영역에서 기존 수술법과 대등한 치료 결과를 보였으나 유의한 차이를 나타내지는 않았다[33,34]. 현재 비중격성형술은 내시경의 사용, 개선된 수술기구 및 다양한 술기로 인해 복잡한 형태의 비중격 만곡증에 대해서도 교정이 용이해졌다.
코성형술
정형외과 전문의인 Jacques Joseph은 “현대 코성형술의 아버지”로 알려진 인물로 코성형술에 관한 대다수의 술기를 정의하였다. 비혹을 가진 환자에서 축소성형술을 고려하기 전 정신사회적인 요소들을 고려하였으며, 1928~1929년에 “코성형과 기타 안성형(Nasenplastik und sonstige Gesichtsplastik)”을 발표하면서 비내 코성형술을 굳건한 과학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Joseph의 원칙과 술기는 Gustav Aufricht, Joseph Safian과 Samuel Fomon에 의해 전세계적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Rethi(1921년)는 비첨 교정을 위한 개방형 코성형술에서 비주 절개를 최초로 시행했다. Cottle(1947년)은 반관통절개를 실시했으며 폐쇄적 접근법 발전의 강력한 유도제가 되었다. Sercer(1957년)는 비주 절개를 통해 비강과 비중격에 도달하기 위한 개방 접근법을 사용하였고 “코의 박리(nasal decortication)”라고 명명했다. 미용성형 분야까지 비과학의 영역에 포함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고, 1964년에 설립된 미국안면재건성형외과(American Academy of Reconstruction and Facebook Scale)와 1977년에 설립된 유럽안면외과(Joseph Society)는 이분야 최초의 학회들이다.
1970년대 초 Padovan이 개방 접근법을 제안하는 저서를 발표한 뒤 다시 주목을 끌기 시작했으며 이후 Goodman과 Anderson도 개방형 접근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 Gunter는 개방형 코성형술의 지지하였으며, Sheen은 폐쇄 접근법을 장려했다.
현대 코성형술은 짧은 역사 동안 수많은 전문가들의 지식 공유를 통해 학문의 급격한 발전을 이뤄냈으며, 개방법과 폐쇄법의 장단점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활발히 지속되고 있다.
내시경 부비동수술
20세기 이전까지 상악동 수술은 치조연, 중하비도 및 상악동 전벽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시도되었지만, 결국 견치와를 통해 상악동의 전벽을 노출시킨 뒤 개방하는 방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Caldwell(1893년)과 Luc(1897년)은 감염부위의 점막을 벗기고 비내 상악동 절개술을 시행한 뒤 견치와 절개부위를 봉합하는 술기를 대중화시켰다. 이후 1900년대 첫 10년 동안 Killian과 Siebenmann은 중비도를 통해 구상 돌기절제술을 시행하여 상악동의 배농을 시도하였으나 초기 수술 기법들은 비부비동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로 인해 치료 효과가 떨어졌다[25].
Hirschmann(1901년)은 방광경(cystoscope)을 4 mm 직경으로 개량한 내시경을 최초로 이용하여 발치한 어금니 치조와를 통해 상악동 내부를 관찰하였다. Reichert는 7 mm 내시경하에서 구강상악동루를 통해 상악동에 기본적인 조작을 시행했고 이는 첫 내시경 시술로 간주될 수 있다. Malts [35]는 부비동 진단 방법으로 내시경 사용을 촉진시켰으며 “부비동 내시경(sinuscopy)”을 명명했다.
Lothrop(1915년)은 전두동염 치료를 위해 전두동과 비강 사이 더 넒은 영역의 소통을 주장하였고, 전사골동, 전두동사이 격벽 및 비중격 상부를 함께 절제하였다. Lynch와 Howarth(1921년)는 전두동과 사골동 병변에 대해 흉터나 골기형을 최소화하기 위한 외부 접근법을 제안하였고 이후 1960년 대까지 점막을 모두 제거하는 술식이 전두동염을 치료하는 표준술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절개법은 “Lynch-Howarth 절개”로 명명되었으며, 추후 변형 Lynch 수술에서는 점막을 보존하고 스텐트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수정되었다[36].
1950년대 Messerklinger [37]는 사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Indian ink를 사용하여 상악동내 점액 수송을 내시경으로 관찰한 결과 상악동내 점액은 언제나 자연공을 통과하여 나온 뒤 후비공 방향으로 이동한다는 중대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자연공을 통한 수송 기능이 손상되면 반복적인 부비동염이 발생하며, 전사골동과 개구비도단위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점액섬모 수송의 발견으로 인해 재발하는 만성부비동염의 병태생리학이 정립되었고, 기존의 치료였던 Caldwell-Luc 수술, 하비도 상악동 절개술이 실패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부비동수술의 주요 초점은 이제 자연공을 통한 효과적인 환기로 전환되었다.
1954년부터 Storz사에서 광섬유 내시경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수술 영역의 내시경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내시경은 Godfrey Hounsfield(1969년)가 개발한 CT 스캔(computerized tomography scan)과 더불어 비강, 비측벽 및 개구 비도단위에 대한 상세한 관찰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Messerklinger(1972년)가 진단 및 수술용 비내시경을 재 도입한 뒤, Reynolds와 Brandow [38]는 내시경 및 현미경 유도하 하비도 상악동 절개술을 시행했으며, Wigand와 Steiner(1977년)는 내시경만으로 상악동 절개술을 시행하였다[39]. Messerklinger는 자연공을 통한 기능적인 환기와 배농을 목적으로 전두와를 통해 전두동을 접근하고, 사골누두를 통해 상악동에 접근하는 Messerklinger 술기를 정립했다. 그 외에도 Wolfgang Draf, Malte Wigand와 Pierre Rouvier는 초기 내시경 부비동수술의 개념을 정의하는데 있어 큰 기여를 한 인물들이다. Messerklinger의 제자였던 Heinz Stammberger는 David Kennedy와 함께 다양한 학술활동과 강의를 통해 내시경 부비동수술을 전세계적으로 대중화시킨 핵심적인 인물이다. Kennedy 등[40]은 “기능적 내시경 부비동수술”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아시아에서 부비동수술은 일본의 Kenzo Takahashi(1918년)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되었고, Honda와 Takahashi [41]가 비내 부비동수술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1971년 Ryo Takahashi는 합병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저판을 지표로 7단계로 사골동수술을 시행하는 Takahashi [42] 술기를 제안하였다[43]. 이후 Moriyama [44]는 점막 박리에 의해 노출된 뼈는 치유 과정에 6개월 이상 소요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내시경 사골동수술에서 점막 보존의 중요성에 대해 주장하였다. 국내에는 1980년대 후반부터 내시경 부비동수술이 보급되어 1990년대부터 급속도로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초기 내시경 부비동수술의 발전은 세 가지 큰 전환점으로 인해 현대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첫번째 사건은 Harold Hopkins에 의한 고화질 내시경의 개발이다. Harold Hopkins(1954년)가 발명한 기둥형 렌즈(rod lens)는 현저히 강화된 광전도 능력과 뛰어난 화질을 나타냄으로써 내시경 검사의 새 시대를 열었다(Fig. 5). 1967년 Karl Storz는 이 특허를 사들인 뒤 고품질의 영상, 조명 및 광섬유로 내시경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초기 카메라는 무겁고 부피가 컸지만 소형화되면서 외과의가 장시간 수술을 시행함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개선되었다. 45도 내시경의 개발은 전두동 수술에 큰 진전을 가져왔다. 향상된 밝기와 넓은 시야각을 제공했고 또한 술자가 쉽게 내시경을 진입할 수 있도록 앞을 볼 수 있는 동시에 굴절된 시야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Fig. 5).
내시경 부비동수술 발전의 두번째 기폭제는 영상의학적 진단 기술의 발전이다. 1970년대 후반 Messerklinger와 Stammberger는 비부비동의 복잡한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하이포 사이클로이드 다단층촬영을 사용했다. 초기에는 5 mm 간격으로 관상면과 시상면을 촬영하였고 전통적인 X선보다는 개선되었으나, 낮은 해상도로 인해 개구비도단위를 정확하게 관찰할 수 없었고 높은 방사선량 노출로 인해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이후 등장한 CT 스캔은 사골동의 복잡한 구조와 각각의 부비동을 해석하기 위한 나침반이 되었다. CT 스캔은 1970년대 초 영국 EMI사의 Godfrey Hounsfield에 의해 개발되었고 최초에는 EMI Scan이라고 불렸다. 초기에는 축면으로 촬영하였으며 다른 회사들도 이 스캐너를 생산하게 됨에 따라 computerized axial tomography(CAT)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David Kennedy는 영상의학과 의사인 Simion Zinreich와 협력하여 낮은 방사선량으로 부비동과 개구비도단위를 이미지화하는 기술을 다듬고 개발했다. 5 mm 축면 대신 2 mm, 3 mm 관상면을 이용해 개구비도단위를 재구성하였고 접형동에는 5 mm 절단면을 적용하여 사골동의 해부적 구조 파악과 질병 진단에 큰 발전을 이뤘다. 이후 Zinreich는 Stammberger, Kennedy와 Wolf 등과 함께 비과학 영역의 CT 스캔 사용을 전세계적으로 보급하는 주역이 되었다[45]. 자기공명영상촬영(magnetic resonance imaging, MRI)의 출연으로 인해 우수한 해상도로 연조직 촬영이 가능해지면서 부비강내 종양과 두개저 미란을 동반한 수막뇌류와 같은 질환의 진단에서 MRI는 필수적인 진단 장비가 되었다. 하지만 골성 구조의 시각화에 있어 높은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CT 스캔은 여전히 부비동의 주요 진단 검사로 남아 있다.
세번째 중요한 사건은 용도에 적합한 수술기구의 발전이다. 초기 내시경수술에서는 움켜쥐는 형태의 기구가 주로 사용되었고 이는 점막 보존에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점막 박리에 의해 치유되지 않는 골 노출 소견이 내시경 추적 관찰 과정에서 자주 관찰되었고, 반흔, 만성 염증, 신생골 형성, 점액종 및 지속적인 통증 등의 소견을 나타냈다. 따라서 점막 보존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해 미세절삭겸자(through-cutting forceps)가 가장 먼저 개발되었다. 미세절삭겸자는 straight와 45도 upbiting 형태로 뼈와 점막을 모두 자를 수 있게 제작되었다. 기존의 기구를 이용한 접형동 수술의 경우 전벽을 내골절시켰기 때문에 경동맥과 두개저 손상 위험성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미세절삭겸자를 이용하여 사골동내에서 상비갑개 하부를 절단하여 접형동의 자연공을 직접 관찰할 수 있고 straight mushroom punch 등으로 자연공을 넓혀줌으로써 접형동 수술의 안정성이 증가되었다. 전두동 수술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굴곡 미세절삭 겸자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점막 박리는 줄이고 안전한 골 제거가 가능해졌다.
미세흡입절삭기는 원래 정형외과에서 소관절을 대상으로 관절내시경하에서 연골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Setliff와 Parsons(1996년)는 코수술에 미세흡입절삭기를 비내시경수술에 도입하여 기계적인 동력을 사용하여 조직과 뼈를 제거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초기 미세흡입절삭기는 느리고 자주 막혔지만 개선된 미세흡입절삭기는 절단 능력, 흡입력, 속도, 크기 및 각도에서 극적인 발전을 나타냈다. 미세흡입절삭기의 날은 교체가 가능하여 예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 기존 기구들에 비해 점막 박리 위험을 현저히 낮출 수 있다. 미세흡입절삭기의 주요한 장점은 출혈 상황에서도 시각화를 가능케 하는 동시 흡입 기능이다. 이는 미세흡 입절삭기로 넓은 부위를 수술할 경우 광범위한 출혈이 발생할 수 있어 경험이 부족한 술자에게는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미세흡입절삭기의 빠른 조직 제거 속도로 인해 안와 지방과 접촉하거나 두개내로 들어갈 경우 기존 기구보다 큰 손상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를 요한다. 그 외에도 촉각 피드백이 부재하여 골칸막 뒤쪽으로 촉지가 불가능하며, 두꺼운 뼈에 다소 비효율적이라는 단점이 존재한다.
두개저, 안와 및 종양 수술
외과의사의 수술에 대한 숙련도가 상승하고 수술기구가 발전함에 따라 내시경수술의 범위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고 최근에는 두개저, 안와 병변에서 내시경이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Harvey Cushing(1912년)이 처음으로 접형동을 경유하여 터키안에 접근하였고, Dandy(1926년)는 전두엽 개두술을 통해 뇌척수액비루 환자의 수술적 복원을 시행했다. 이후 Dohlman(1948년), Hirsch(1952년), Hallberg(1964년)도 외부 접근법을 이용한 뇌척수액비루 치료의 성공적인 사례들을 보고하였다. 신경외과적으로는 Gerard Guiot(1970년)에 의해 처음으로 내시경이 사용되었고, Wigand(1981년)는 내시경적 접근법을 이용하여 두개저 결손의 복원을 시행하였다. 내시경만을 이용하여 시행하는 뇌하수체수술은 Jankowski 등[46]에 의해 최초로 보고되었고 이후 Carrau 등[47]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비중격 유경 피판이 두개저 재건에 이용되고 높은 치료 성공률을 보이면서 현재 대다수의 뇌하수체 수술에서 내시경이 사용되고 있다. 두개저 결손 재건에서도 90~95%의 높은 치료 성공률과 낮은 이환율을 나타내어 내시경 재건술은 뇌척수액비루의 가장 선호되는 치료법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까지 두개저 영역의 내시경 수술은 수막종, 두개인두종, 척삭종과 같은 병변까지 적응증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안와 질환에서 내시경 사용은 Kennedy 등[48]이 시행한 그레이브스 안병증 환자의 감압술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누낭비강문합술, 시신경관 감압술 및 종양 절제에 내시경적 접근법은 널리 활용되고 있다. 2011년에 보고된 안와 해면혈관종 내시경 절제술의 치료 효과에 대한 다기관 연구에서 78.3%의 환자가 수술 후 대칭적 안구 형태를 보이며 성공적인 치료 결과를 나타냈다[49].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된 내시경 종양 제거술의 기본 원칙은 종양의 원발 부착부위를 세심하게 식별한 뒤 넓은 절제연을 확보하여 제거하는 것이다. 술기와 장비의 발달로 두개 내로 침범한 종양도 내시경적 절제가 가능해졌으며, 근적외선 영상 기술을 이용하여 수술 도중 종양의 추적과 절제연을 평가하는 방법이 개발 중에 있다. 악성종양에 특이적으로 축적되는 방사선표지염료를 사용하여 내시경 화면을 통해 정상 조직과 병변을 감별할 수 있어 내시경 종양제거술의 치료효과와 안정성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새로운 임상 기술
컴퓨터보조 영상유도수술
내시경 부비동수술은 견고한 골성 구조를 경계로 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컴퓨터보조 영상유도수술(computer-aided image-guided surgery)에 이상적인 적응증이다. 1980년에 Zinreich에 의해 최초로 내시경 부비동수술에 영상유도장치가 사용되었지만 설치와 조작이 어렵고 머리의 고정도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치과 충전재로 자기장이 혼동될 정도로 부정확하였다[50]. 오늘날의 영상 유도 수술 장치는 더 넓은 범위로 향상된 추적이 가능하며 가단성 탐침(malleable probe)을 이용하여 전두동과 같이 기존의 기구로 접근하기 어려웠던 병변을 평가하기 용이해졌고, 이에 대해 미국 이비인후-두경부외과학회(American Academy of Otolaryngology-Head and Neck Surgery)는 영상 유도 수술의 적합한 적응증을 발표한 상태이다[51]. 하지만 아직 영상 유도 수술이 기존의 수술법과 비교하여 합병증을 줄인다는 명확한 근거는 부족한 상태로 추가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두개저 로봇수술
2007년부터 두개저 병변에 대해 로봇을 이용한 접근법을 통해 내시경 수술을 시행하려는 노력은 존재했다[55]. 로봇수술은 술자가 3차원 영상을 보면서 손떨림 없이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 경막봉합과 같은 술기를 정확히 시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소형화된 로봇 팔과 내시경수술에 적합한 형태의 수술기구가 개발되면 전중두개저 영역의 최소짐습 접근이 가능해질 것이며, 임상 영역에서 내시경 부비동수술의 적응증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3차원 내시경
3차원 내시경은 1993년 처음 의료계에 도입된 뒤 상용화되었지만 아직까지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비용 문제뿐 아니라 술자가 장기간 사용시 어지러움과 두통 등 불편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3차원 내시경이 기존 내시경과 비교하여 공간감을 강화시키고 작업효율을 증가시켜 수술시간을 단축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수술 시간, 합병증 발생률 및 입원 기간에 있어 유의한 차이가 없다는 연구 결과도 함께 보고되고 있다[56]. Ogino-Nishimura 등[57]에 의하면 3차원 내시경을 통해 수술을 참관한 의사들에게 설문을 시행한 결과 89%의 응답자에서 기존의 내시경보다 해부학적 구조를 이해하기 쉬웠다고 답하여 교육적인 측면에서 3차원 내시경이 가지는 강점을 알 수 있다. 수술 중 술자가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 방향으로 광원과 모니터를 개선하고, 출혈이 발생하더라도 즉각적으로 최적화된 화면을 구성할 수 있는 렌즈 세척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면 향후 3차원 내시경은 2차원 내시경을 대체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풍선보조 부비동수술
풍선보조 부비동수술(balloon-assisted sinuplasty)은 혈관성형술에 사용되는 것과 유사한 풍선으로 부비동의 자연공을 확장시키는 수술방법으로 Bolger와 Vaughan(2005년)이 제안하였다. 카테터를 이용하여 부비동의 자연공에 풍선을 위치시킨 뒤 최대 16기압의 높은 압력으로 미리 정해진 크기까지 풍선을 확장시켜 점막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부비동의 환기와 배농을 정상화시키는 원리이다. 따라서 기존 수술방법을 적용하기 힘든 다양한 고위험 환자군에서 최소침습으로 수술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치료 성공률은 기존의 내시경 부비동수술과 비교하였을 때 비슷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35~97%로 다양한 치료 결과를 나타냈다[58-60].
비강내 충전재의 발달
내시경 부비동수술 후 예후를 향상시키기 위한 다양한 비강내 충전재가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다. 비강내 충전재는 수술부위를 지혈하고, 상처 치유과정을 촉진시키며, 환자의 불편감을 완화시키고, 약물 전달을 통해 염증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소재에 따라 크게 흡수성과 비흡수성으로 분류되며, 흡수성 충전재에는 세포외기질 화합물, 응고반응 침전제, 생체중합체가 해당된다. 세포외기질 화합물에는 젤라틴, 히알루론산, 젤라틴-트롬빈 혼합물이 해당되며, 응고반응 침전제에는 피브린 아교가 있으며, 생체중합체로는 carboxymethylcellulose (CMC), microporous polysaccharide hemospheres(MPH), 키토산, 폴리우레탄 및 polyethylene glycol(PEG)이 있다. 비흡수성 충전재에는 polyvinyl acetate (PVA), polyethylene trephtalate(PET), CMC로 코팅된 섬유 및 스폰지가 해당된다. Massey와 Singh [61]이 시행한 메타 분석에서 시중에 출시된 충전재의 치료결과를 지혈, 수술부위의 치유, 환자의 불편감 측면에서 비교하였을 때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우월한 제품은 없었다.
약제유출형 스텐트는 기존의 충전재 및 약물 치료의 제한점을 보완하기 위해 2010년대초 개발되었다(Fig. 6). 생체흡수성 스텐트로 지속적으로 스테로이드를 분비할 뿐 아니라 전두동의 개방성을 유지하고 사골동내 협착을 방지하는 스페이서(spacer)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가피, 혈괴 및 분비물의 저류를 감소시켜 섬유화를 방지하고 정상 점막 회복을 촉진하며 환자의 불편감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62]. 여러 연구에 따르면 약제유출형 스텐트를 삽입한 부비동은 약제를 포함하지 않은 대조군과 비교하여 수술 후 추가적인 치료는 29~38.1%, 유착 제거술은 51~52%, 용종성 변화는 44.9~46%, 경구 스테로이드 복용 필요성은 55.6% 감소하였다[63-65]. 치료 결과는 모두 통계적으로 모두 유의하였으며, 약물에 의한 안압 변화 등 안과적 합병증은 유의하게 증가하지 않았다. 약제유출형 스텐트는 현재 고가의 가격으로 인해 국내에서 사용되고 있지 않으나 가격이 안정화되고 국내 의료 현실에 적합한 제품이 상용화된다면 향후 폭넓게 사용될 것이다.
3차원 인쇄
3차원 인쇄는 액상수지, 분말, 광폴리머 및 시트 등의 소재를 연속적으로 쌓아 물체를 제작하는 적층 제조 기술이다[66]. CT와 MRI의 단면 영상을 시각화된 입체적인 모델로 변환할 수 있어 의료계에서 다양한 임상 적응증에 활용되며 큰 각광을 받고 있다. 비과 영역에서는 두개-안면 재건술, 종양 제거술, 내시경 부비동수술 및 경접형동 수술에서 수술 전 계획 수립, 시뮬레이션, 환자 맞춤형 임플란트 제작 등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67-69]. 비중격 천공, 외상 및 종양으로 발생한 두개-안면 결손에서 맞춤형 임플란트를 이용하여 성공적으로 재건한 사례들이 보고되었다[70,71]. Tack 등[72]의 연구에 따르면 두개-안면, 안와 수술에서 3차원 인쇄 모델의 이용은 수술시간을 감소시키고 치료결과와 비용효율을 향상시켰다. 또한 3차원 인쇄는 복잡한 해부학적 구조를 파악하는데 용이하며 촉각적 학습이 가능하여 수련의 및 환자에게 교육적인 활용 가치가 높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비인후과학 영역에서 3차원 인쇄를 이용한 시뮬레이터는 예측 타당성이 확립되지 않았고, 인쇄물의 멸균성과 호환성의 개선이 요구된다. 향후 바이오프린팅과 조직공학의 진보와 더불어 3차원 인쇄를 통한 신속한 생체적합형 임플란트 제작이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