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List > J Korean Neuropsychiatr Assoc > v.57(2) > 1095171

박, 강, Park, and Kang: 진화정신의학 I-진화심리학의 개념 및 진화적 정신병리학

Abstract

The evolutionary theory is applied to explain a multitude of natural and social phenomena. In medicine, evolutionary biology and psychology enables us to take perspectives beyond the biomedical paradigm of disease. The evolutionary pathophysiology looks for the ultimate cause of disease rather than the proximate causes. The ultimate cause of disease lies in the evolved psychological mechanisms (EPMs). This recognition fundamentally alters the traditional view of pathogenesis that a disease is the result of alien pathogens invading our bodies. Especially in psychiatry, the insight that the pathologic and normal mind have a common basis and that discriminating between them solely by means of natural science is rather impossible, this makes us rethink the validity of current reductionistic approaches to psychiatric nosology. In this article (Part I), the authors introduce evolutionary biology and psychology. Detailed application of the evolutionary perspective to psychiatric disorders will be discussed in the continuing article (Part II).

서론

진화란 생물 집단에서 세대를 지나면서 유전되는 특성의 변화를 말한다.1) 진화는 분자, 개체, 종 등 다양한 수준에서 생물학적 다양성을 갖게 한다. 35억 년 전 지구상에 원조 생명체(The 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가 탄생한 이후2) 같은 유전자 코드를 사용하는 다양한 종들이 발생하였고, 그중에는 우리 인간도 있다. 진화는 새로운 종의 생성 및 멸종을 설명하며, 한 종 안의 개체들이 갖는 유전형(genotype) 및 표현형(phenotype)의 다양성 역시 진화론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근대 이후 여러 학자들이 진화적 사고를 가졌지만, 진화론을 대중화시킨 사람은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었다. 그는 저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1859)3)에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진화를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4)
1) 형질 즉 겉모습, 생리적 기능, 행동 양식은 개체마다 다르다.
2) 다른 형질을 가진 개체들은 생존 및 번식할 때 성공할 확률(적합도, fitness)이 다르다.
3) 번식에 성공하면 그 개체의 형질은 다음 세대로 대물림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적합도가 높은 개체들이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어 종을 대표하는 형질의 변화 즉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직관적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지만, 진화에 대해 목적론적 해석을 낳을 위험도 가지고 있다. 신이 어떤 계획에 의해 생물체를 창조하였다는 과거의 견해에서 신이 자연으로 바뀌었을 뿐, 미리 계획된 목적을 향해 종이 진화하였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진화적 관점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된다. 진화를 통해 탄생한 종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진화가 사전 설계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진화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의 변화일 뿐 향후의 변화에 대한 예측 등은 진화와 관계없다. 그래서 과거에 문제를 잘 해결하여 진화되었던 특성은 시대가 바뀌면서 질병을 유발하는 특성이 되기도 하고, 사소한 환경의 변화에 종이 대응할 능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음이 사후에 드러나기도 한다. 질병에 대한 진화생물학적 이해는 여기서 출발한다.
진화론은 신이 창조한 완벽한 인간이라는 서양의 전통적 세계관을 허무는 역사적 사건이었으므로 널리 받아들여지기까지 다양한 저항을 겪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의 지성은 생물계의 종 다양성 이외에도 많은 생물학적, 더 나아가 사회문화적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진화론을 응용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통찰을 얻고 있다. 저자들은 이 논문에서 진화적 관점에서 질병이란 무엇인지 논할 것이다. 또한, 몇 가지 정신 현상 및 정신질환을 진화적 관점에서 조망하려 시도할 것이다. 이 분야의 특성상 엄밀한 실험적 증명보다는 가설적 주장들이 많이 소개될 것이며, 다른 문헌들에 언급되지 않은 저자들 고유의 주장들도 전개될 것이다. 또한, 이 논문의 독자는 정신의학 전공으로 진화생물학에 대한 기본지식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 가정하였다. 따라서 저자는 진화생물학 및 진화심리학에 대한 개괄적 소개로 논문을 시작할 것이다. 저자들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질병으로 간주되는 정신 현상의 상당수가 아무런 근거 없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삶을 무너뜨리는 이질적인 것들이 아니라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겪었던 환경에 대한 적응 과정과 밀접하게 관계있다는 점을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근접 원인(proximate cause)이 아닌 궁극적 원인(ultimate cause)의 관점에서 정신병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진화적 관점을 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통찰은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환경의 영향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진화론적으로 접근하면 정신병리와 정상의 구분이 사회문화적 맥락에 의존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는 정신과 분류체계가 자연적(naturalistic)이라기보다는 규범적(normative)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최근 정신과 진단분류체계가 카테고리적 접근에서 벗어나 차원적 접근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도 비정상을 정상과 자연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취급하였던 관점의 한계가 학계에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조작적으로 정의된 환자에서 정상과 뚜렷이 구분되는 병적인 심리와 첨단 도구로 측정되는 뇌 회로의 이상 사이의 관계를 찾는 것이 정신의학적 탐구의 핵심이라 강조하는 오늘의 환원론은 이제 전환기에 와 있다.

진화생물학적 접근법들

집단선택 및 유전자 관점

다윈의 초기 가정에 의하면 개체의 행위는 자신의 생존과 번식 확률을 최대로 높이도록 진화되어 온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개체의 행위 중에는 적합도 최대화 원리에 명백하게 어긋나는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다른 개체의 적합도를 높이지만 자신의 적합도는 떨어뜨리는 이타적 행위들이다. 이타적 행위는 우연히 비정상적 상황에 처한 일부 개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수 개체에서 나타나고 매우 흔하며 다양한 종에서 관찰된다. 벌이나 개미 같은 사회성 곤충에서, 생식능력이 없어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없는 일벌이나 일개미가 집단을 위해 일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인류에서도 이타적 행위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 일관되게 존재해 왔다. 이 패러독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화적 선택의 주체가 개체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등장한 이론이 집단 선택(group selection)론이다. 이 이론 역시 다윈이 처음 제시했는데, 그는 소집단 간 협동의 이익이 그 집단 내에서 이기적 개인의 이익보다 클 경우 집단선택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집단 선택이 일어나는 기전에 대해서는, 어떤 표현형을 가진 개체가 자신의 적합도는 높지만, 집단의 다른 개체를 해쳐서 전체적 파국을 맞게 된다면 그 표현형을 지닌 개체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논리가 적용되었다.5) 이타적 표현형이 적극적으로 선택된다기보다는 극도의 이기적 표현형은 선택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동물행동학자 로렌츠(Konrad Lorenz, 1903~1989)도 집단 선택론을 옹호하여 분노라는 것(Das sogenannte Böse, 1963)6)에서 동물의 행동 패턴은 종을 위한 것이라 주장하였고, 틴버겐(Nikolaas Tinbergen, 1907~1988)등 다른 동물행동학자들도 이 주장에 동의하였다. 이후 집단 선택은 적응에 대한 인기 있는 설명이 되었지만, 이 주장은 튼튼한 학문적 근거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집단 선택이 진화의 주된 기전이라는 주장에 대한 학자들의 기본적 의문은, 선택은 일차적으로 개체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7) 개체 수준에서는 이기적 개체가 이타적 개체보다 적합도가 높기 때문에 경쟁에 유리한 것은 이기적 개체일 수밖에 없다. 수학적 모델에 근거해서도 개체는 그룹을 위해 자신의 적합도를 희생하지 않는다고 주장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 유전자 관점(gene's point of view)이다.8) 여기서 진화의 동인은 집단도 개체도 아닌 유전자가 된다. 유전자는 친족(kin)간에 공유하는 것이므로, 자신의 적합도뿐만 아니라 유전자를 공유하는 친족의 적합도도 같이 포함하여야 실제적인 적합도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유전자 관점이다. 특정 유전자가 유발하는 행위가 그 개체의 적합도는 떨어뜨리지만 같은 유전자를 가진 다른 개체의 적합도를 해당 개체에서의 감소분보다 더 높이 올린다면, 이 유전자는 선택된다는 것이다. 이를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라 한다. 집단 선택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전자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닌데 어떻게 선택을 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지만, 개체 수준의 선택도 개체가 선택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행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체 수준의 선택이란 개체의 적합도를 높게 하는 조건이 후대에 전달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불과하다. 유전자 수준에서 포괄 적합도가 높은 조건이 선택된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전자 관점은 진화생물학이라 크게 통칭되는 다양한 학문적 입장들의 공통적 기반이 된다. 물론 유전자의 ‘관점’이라는 의인화된 표현은 직관적인 이해를 돕지만, 목적론을 함축하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으므로 학문적으로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더 나아가 다수준 선택(multilevel selection) 이론은, 선택이 직접 이루어지는 것은 개체 수준이지만 진화의 과정에서 중첩된 구조들, 즉 유전자, 세포, 개체, 집단 등 다양한 수준에서 적합도를 최대화하기 위한 선택이 일어나며 각 수준 간에 상호작용도 상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9) 이렇게 해서 이전의 집단 선택론에서 발전한 진화생물학 이론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아래와 같은 다양한 관점이 있다. 각 관점들이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사회생물학(Sociobiology)

사회생물학은 동물행동학(ethology)에서 발전한 분야로, 윌슨(Edward O. Wilson, 1929~)의 사회생물학(Sociobiology, 1975)10) 및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의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1976)8) 등의 저서가 이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집단 내 개체들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진화의 과정에서 왜 그 행위가 선택되었을까?”를 추구한다. 특히 사회적 동물의 이타적 행위가 관심사인데, 이를 설명하려 유전자 관점을 취한다. 특정 유전자 위치(genetic locus)를 두고 각 대립유전자(allele) 간에 경쟁이 일어나는데, 한 대립유전자의 적합도가 높다는 것은 다음 세대의 집단에서 그 대립유전자의 빈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세대에 특정 대립유전자의 빈도가 높아지는 것은 그 대립유전자를 가진 개체 자신들의 적합도가 높아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개체가 자신의 적합도를 낮게 하는 행위(이타적 행위, 희생)를 함으로써 같은 대립유전자를 가진 친족의 적합도가 크게 높아진다면, 그 대립유전자는 희생되는 개체를 통해서 후대에 전달되지 못하더라도 친족을 통해서 후대에 전달됨으로써 결국 집단 내 빈도가 높아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희생 행위는 진화적으로 선택된다. 이를 친족 선택(kin selection)이라 한다. Hamilton11)은 이 조건을 공식화하여 아래와 같은 조건에서 친족선택에 의한 이타적 행위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c<b×rjkna-57-157-e001
c: 나의 이타적 행위에 의해 감소하는 나의 적합도
b: 나의 이타적 행위에 의해 증가하는 친족의 적합도
r: 유전적 연관 관계(유전자를 공유하는 확률)
혜택을 받는 개체가 여럿이라면 식의 우변은 그것들의 총합이 될 것이다. 즉 이타적 행위가 나타나는 조건은 아래와 같다.
c<ni=1bi×rijkna-57-157-e002
사회적 곤충의 이타적 행위는 해밀튼의 공식으로 설명된다. 한 개미 집단을 구성하는 개체는 한 여왕개미의 후손이므로 친족들이다. 일개미들의 노동의 수혜자는 자신과 유전자를 공유하는 개체, 궁극적으로는 여왕이 된다. 개미는 유전적으로 haploidiploidy에 의해 성별이 결정된다. 수컷은 미수정란에서 태어나 염색체가 한 벌이며(반수체, haploid), 암컷은 수정란에서 태어나 염색체가 두벌이다(이배체, diploid). 통상적 이배체 생식에서 형제자매는 유전자의 50%를 공유하지만, haploidiploidy 곤충에서, 한 여왕개미가 한번 교미한 뒤 생산하는 후손 일개미(diploid)들은 자매들임에도 불구하고, 반수체인 부계 유전자의 100%, 이배체인 모계 유전자의 50%를 공유하여 결국 75%의 유전자를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해밀튼 공식의 r값이 특히 높게 되므로 일개미의 이타적 행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12) 어머니의 자식을 위한 희생은 인간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포괄적 적합도 추구 현상이다. 이론적으로 2명 이상의 자식이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더 살아남는다면, 포괄 적합도의 측면에서 그 희생은 타당하다. 물론 친족선택 중 자식을 위한 희생은 특수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수정된 해밀튼 규칙

윌슨은 친족 선택은 현대 인류에서 보이는 극단적 사회성의 기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haploidiploidy가 생식하지 않는 일꾼 쪽을 강하게 선호 한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잘못된 계산이라 하였다. 또한, 무엇보다 친사회성은 haploidiploid 곤충에 국한되지 않고 이배체 생식을 하는 동물에서도 강력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이타성에는 친족 선택 이외의 기전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해밀튼의 원래 수식에서 b를 bk(친족 개체의 이득)와 be(집단 전체의 이득)를 나누어 아래와 같이 수정하였다.10)
c<bk×r+bejkna-57-157-e003
그는 사회적 곤충에서 be>bk×r라고 주장하였다. 즉, 유전적 친족보다는 집단 전체에 대한 이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부정된 집단 선택론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으로 비판받기도 하였지만, 이 이론은 다수준 선택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진화심리학은 사회생물학과 비슷한 접근을 하지만, 표출된 행위보다 그 행위를 일어나게 하는 진화된 심리 기전(evolved psychological mechanism, 이하 EPM)13)에 초점을 맞춘다. EPM은 모듈화된 심리 기전으로, 진화의 과정에서 선택되는 것은 행위 자체라기보다는 행위를 결정하는 기전이다. 환경의 변화가 없다면 한 종에서 특정 기전의 발현으로 일어나는 행위는 일정하며 적응적이겠지만, 환경이 달라진다면 같은 기전이 다른 행위로 나타날 수도 있고, 행위 자체는 달라지지 않더라도 부적응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예컨대 진화적 적응 환경(environment of evolutionary adaptedness, 이하 EEA)인 소규모 수렵채집사회에서 양육자에게 강력하게 의존하는 태도는 유아의 생존 전망을 증가시켰으므로 EPM으로 진화되었지만, 이 기전은 현대 환경에서는 분리불안이라는 적합도가 높지 않은 행위로 표출된다는 것이 보울비(John Bowlby, 1907~1990)의 해석이다.14) 이 관점은 EEA에 대한 정의가 자의적이고, EEA이후 EPM의 발전이 없었으리라고 보는 가정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특정 행동 양식이나 정신질환에 대해 진화적 설명을 할 때 가장 널리 적용되는 관점은 진화심리학적인 것이다. EPM 및 EEA의 개념은 뒤에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문화 진화론(Cultural evolution)

문화 진화론은 문화가 유전자처럼 다윈주의적으로 변한다는 가설이다. 인간은 다세대에 걸친 학습을 통해 문화 체계를 구축하였고, 문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데 이 과정이 생물학적 과정인 유전자 진화와 평행하다는 것이다.15) 문화 진화론을 대표하는 개념은 밈(meme)과 미메틱스(mimetics)이다. 미메틱스는 엄정한 학문이라기보다는 대중적 관심의 주제가 된 경향이 있지만, 문화적 요소의 변화와 유전자 진화 간의 유사성에 대한 통찰은 주목할 가치가 있기에 여기 소개한다. 밈이란 문화 복제자(cultural replicator)로서 패션, 대중음악 등 시간이 지나면서 변천하는 문화적 요소들이다. 밈이라는 용어는 유전자(gene)라는 용어에서 차용한 것이다. 특정 밈은 특정 대립유전자처럼 인구집단 내에 전달되는 문화적 단위로서, 유전자가 생식에 의해 후대로 전파되듯이 밈은 학습이나 모방 등 사회적 전달방식을 통해 인구집단에 복제된다. 인구집단에서 대립유전자들의 분포가 다윈주의적 과정[선택, 부동(drift, 무작위적 유전), 개체들의 이동, 돌연변이 등]에 의해 변하듯이 밈의 분포도 다윈주의적 과정에 의해 변화한다. 특정 밈은 이 과정에서 한 시대의 우세한 아이템이 되었다가 금세 사라질 수도 있으며, 몇 개의 밈이 수렴하여 한가지가 되기도 하고, 변이가 일어나 다른 형태로 바뀌기도 한다. 밈의 전파는 직접 편향(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모방), 빈도 의존적 편향(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추구하는 것을 따름), 모델기반 편향(자신이 추구하는 대상이 지닌 다른 속성을 모방), 순응(무조건 다수를 모방) 등의 과정에 의해 일어난다.16) 그런데 집단에서 특정 밈이 우선적으로 선택되는 기저에는 그 집단의 유전적 성향에서 비롯된 특징이 있을 수도 있다. 역으로 문화는 집단의 유전자 진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예컨대 우유 소비가 정착된 문화권의 인구에서 유당분해효소(lactase)의 활성형 대립유전자 빈도는 우유 마시지 않는 문화권의 인구에서보다 훨씬 높은데 이 유전자 선택은 불과 5000~1000년 전 낙농업이라는 밈의 발달에 의해 이루어졌다.17) 이런 관점은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으로 이어진다.

유전자-문화 공진화론(Gene-culture coevolution) 또는 이중 유전(Dual heritance)

문화 진화론은 문화가 유전자처럼 진화하는 것을 모델링하며 문화에 의해 실제 유전자의 진화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사회생물학 및 진화심리학은 사회문화적 행위를 유전자 진화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한다. 공진화론은 이런 입장들을 결합하여 인간 행위를 유전자 진화와 문화 진화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려 한다. 유전자와 문화는 지속적인 피드백을 형성하여 유전자의 변화는 문화의 변화를 일으키고 문화의 변화는 유전자 변화를 일으킨다는 관점이다.18)
유전자-문화 공진화는 인간이 환경에 매우 특별한 적응을 하도록 했다. 유전자 진화에 의한 행동 양식 변화는 수십세대에 걸치는 과정이지만, 수 세대 간의 문화 진화는 유전자 진화 없이도 인간 집단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든다. 열대지방에서 발원한 인류가 한대지방에 정착하게 된 것은 유전적 진화보다는 불과 주거지를 사용하는 문화의 영향이 더 크다. 이 경우 유전자에 가해지는 선택 압력은 줄어들게 되므로 유전자 진화는 지체될 것이다. 반대로 환경에 의해 유전자 진화가 촉진되는 경우는 앞의 유당분해효소 예에서 볼 수 있다.
Cavalli-Sforza와 Feldman19)은 집단유전학의 모델을 차용하여 유전자와 문화(행동 양식)의 상호작용에 의해 각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모델을 연구하였다. 이 모델에서 문화란 개인 사이에 학습되고 사회적으로 전달되면서 진화하는 아이템들의 모임인데, 개인이 특정 문화 아이템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 특이적인 유전적 성향에 의한다고 보며, 개인이 받아들인 문화는 후손 번식을 위한 적합도와 관계된다. 따라서 밈들과 유전자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데, 이를 기반으로 구축한 수학적 모델은 밈의 분포 빈도 및 대립유전자의 분포 빈도가 세대에 따라 변화해가는 궤적을 제시한다. 조건에 따라 분포 빈도의 변화 속도는 달라진다. 또한, 이 궤적은 진동할 수도 있고, 한 대립유전자 또는 밈이 사라져서 유전적 또는 문화적 다형성이 없어질 수도 있으며, 다수의 대립유전자 또는 밈이 평형을 이루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진화적 게임이론(Evolutionary game theory)

게임 이론은 상호작용하는 개체들이 특정 상황에서 어떤 전략을 취해야 각자가 최대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지, 전략의 분포가 평형을 이루는 조건은 어떤 것인지 등을 설명하려 한다.20) 게임은 규칙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과는 그때 경쟁 상대방이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자신의 행위도 상대방이 얻을 수 있는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참가자는 규칙과,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자신이 예측한 경쟁 상대방의 전략에 의거해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게 된다. 바둑을 둘때 상대방의 수를 예측해서 내 수를 두는 것과 같다. 이런 게임은 참가자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경우에 성립된다. 비합리적인 참가자는 낮은 성과를 얻으므로 경쟁에서 퇴출될 것이다.
그런데 같은 상호작용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경우, 매번 합리성에 의거한 판단을 새로 내리지 않더라도 이미 주어진 전략을 일관되게 사용하여 게임을 할 수 있다. 반복적인 게임을 통해 어떤 전략이 적합도가 높은가가 검증될 수 있다. 적합도가 높은 전략이란 이웃과 경쟁했을 때 더 큰 성과를 얻는 전략으로, 이 과정이 다윈 이론과 비슷하기 때문에 진화적 게임이라 불리운다.21) 진화적 게임은 다수의 개체로 구성된 집단에서 개체 간 무작위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경우 벌어진다. 각 개체는 채택하는 전략에 의해 구분된다. 인구 집단에서 각 개체가 자신이 가진 유전자형에 의해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호작용의 결과는 어떤 전략을 갖는 개체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다. 내 전략의 적합도가 상대방의 전략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 게임이론의 핵심적 요소이다. 그 결과 각 전략별로 개체들이 얻는 성과의 평균을 구할 수 있다. 한 전략이 거둔 성과가 다른 전략의 성과보다 높으면, 집단에서 그 전략을 채택하는 개체의 비율이 증가한다. 적합도에 의해 대립유전자 빈도가 변하는 것은 진화 과정과 같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집단에서 각 전략 사용자의 분포가 변하고 평형 상태가 형성되기도 한다. 특정 전략의 적합도는 게임의 전반적 규칙, 경합하는 다른 전략들, 각각의 전략을 사용하는 개체들과 상호작용하게 되는 확률 등에 따라 달라지므로 고정된 값이라기보다는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 점에서 전략은 EPM과 비슷하다.
진화생물학의 주된 주제인 이타성이라는 측면에서 게임의 전략들을 이타성 정도에 따라 구분한다면, 전략들은 상대방의 것을 모두 빼앗으려는 것에서부터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까지 다양할 수 있다.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것도 전략의 하나다. 상호작용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을 자기가 빼앗으려는 이기적인 개체의 적합도가 이타적 개체에 비해 크므로 이기적 전략이 최종 승자가 되어 인구군을 지배할 것 같지만, 이기적 개체 간의 경쟁이 비용을 발생시켜 총 성과를 감소시키는 환경에서는 이타적 전략과 이기적 전략이 평형을 이루면서 집단이 유지될 수 있다. 이기적인 개체들로만 구성된 사회는 생산성을 잃어 붕괴할 것이고, 이타적 개체들로만 구성된 사회는 그 자체로 안정적이지만 이기적 개체의 침입에 취약해서 일정 지분을 내주게 되므로 중간에서 평형이 이루어진다(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 evolutionarily stable strategies). 개체의 전략이 유전자의 산물이라면, 이 집단에서 이기적 행위를 유발하는 유전자와 이타적 행위를 유발하는 유전자 간에 평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의 기본 개념들

진화된 심리 기전

진화심리학에서는 심리-행동적 진화가 일어나는 단위를 개개의 행위가 아닌 특정 역할을 담당하는 기전(mechanism)으로 보며 이를 진화된 심리 기전(EPM)이라 한다. EPM은 진화의 역사에서 생존과 번식의 문제를 담당하였던 기전들로, 그것이 실제 어떤 행위들로 구현되는지는 종 및 환경에 따라 다르다. 서로 다른 종에서 전혀 달라 보이는 행위가 같은 EPM의 발현인 경우도 있다(행동적 상동성, behavioral isomorphism). 종마다 특이한 구애 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번식 파트너의 주목을 끌어서 번식 성공률을 높이는 기전이 어떤 종에서는 춤추기로, 다른 종에서는 둥지 짓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 집단에서 특정 역할을 담당하는 행위는 문화에 따라서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행위의 기반이 되는 EPM은 문화적으로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종 발달의 역사를 담고 있는 유전자의 작용에 의한다. 따라서 EPM은 진화된 행위의 근접 원인이 아닌 궁극적 원인이 된다. EPM은 특정 행위가 아닌 가상적 기전이므로 도구적으로 정의하거나 실증적인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어느 정도 넓은 범위의 기전을 하나의 EPM으로 간주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즉 몇 개의 광범위한 다용도 EPM이 다양한 행위들과 관계된다고 볼지 아니면 하나의 EPM을 좁게 보아 소수의 행위와 관계된 기전으로 볼지의 문제인데, 후자의 입장은 체계성은 떨어지더라도 진화적 설명을 위해 더 유용하다. 한 개체가 특정 적응 문제를 마주하고 있을 때 특정 EPM이 작동한다고 보는 것이다. EPM은 생리적 활성, 다른 심리적 기전으로의 정보제공, 특정 행위를 일으킴 등의 방식으로 표출되어 문제 해결을 지향한다.22) 한 예를 들자면 새로운 문제(novelty)에 대처하는 EPM들은 새 자극을 우선해서 지각하고, 성질을 파악하여 무시할 것인지 접근하거나 도망갈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결과를 학습하는 기전 등을 포함할 것이다. 같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경우, 전 단계 학습결과에 따라 더 이상 심리적 자원을 쓰지 않고 무시하거나 더 선택적으로 집중해서 반응하는 등의 EPM 기반 행동이 나타날 것인데, 각각은 습관화 및 행동 민감화에 해당한다. Tooby 등13)은 EPM의 몇 가지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1) EPM은 마음의 진화된 구조를 구성하는 자의적이지 않은 기준을 제공한다.
2) EPM은 매우 많으며, 이들은 인간 행위의 유연성에 기여한다(하나의 범용 도구가 아니라 다양한 특화된 도구들이다).
3) 어떤 EPM은 영역 특이적인 반면(반복되는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화), 어떤 것은 그보다 일반적이다(새롭게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진화).
부적응 또는 병적 행위에 대해 진화심리학적으로 생각할 때, 흔히 그 병적인 행위가 어떤 식으로든 과거에는 적합도를 높이는 적응적 가치가 있었을 것이라 상정한다. 어떤 부분에서 이런 논의가 옳지만, 진화되는 것은 개별 행위가 아닌 EPM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특정 행위의 적응적 기능 여부는 행위 자체보다는 행위의 배경이 된 EPM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PM은 적합도를 높였기 때문에 진화된 기전이므로 그 자체로는 적응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EPM의 발현으로 나타나는 행위들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그에 따라 적합도도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진화에 기반한 모든 행위가 EPM의 직접 작용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어떤 행위는 EPM의 부산물일 수도 있고23) 어떤 행위는 돌연변이에 의해 발생한 새로운 ‘잡음’일 수도 있다.24) 이런 요소들이 질병의 진화심리학적 이해를 복잡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근접 원인과 궁극적 원인

과학에서 인과관계를 이해하려고 할 때, 근접 원인(proximate cause)과 궁극적 원인(ultimate cause)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근접 원인은 특정 사건을 유발한 직접적인 원인, 유인(誘因)이다. 궁극적 원인이란 근접 원인에 선행하는 독립적인 요인으로서 그 사건에 대한 더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원인이 된다. 행위의 진화적 이해는 근접 원인이 아닌 궁극적 원인에 대한 이해이다. 이때 어떤 행위의 원인이라 간주하는 것은 그 행위의 진화적 기반이 되는 기전인 EPM이지 그 행위를 유발하게 된 직접적인 유인이 아니다. 예컨대 비만의 근접 원인은 개인이 과식하는 것이겠지만, 궁극적 원인은 고칼로리 식품을 선호하고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도록 진화된 우리의 EPM이라 볼 수 있다. 근접 원인은 개체 수준에서 병태생리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 배경에는 궁극적 원인인 종 수준의 진화적 기전이 있는 것이다.
질병의 생의학적(biomedical) 탐구는 대개 근접 원인에 대한 탐색으로, 신체 변인이 어떤 생리학적 기전에 따라 변해서 결국 정상에서 벗어나는 상태가 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탐구로는 왜 인류에서 그 신체 변인이 그렇게 변하는 경향이 생겼는지를 알 수 없다. 반면 질병에 대한 진화 심리학적 설명은 궁극적 원인을 추구함으로써 근접 원인에 대한 탐색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틴버겐은 궁극적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왜(why, 기전), 언제[when, 개체발생(ontogeny)], 원래의 기능(what original function, 적응적 기능), 어떻게 진화하였나[how does it evolve, 계통발생(phylogeny)]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하였는데25) 이들은 진화생물학 또는 진화심리학 탐구의 주제들이다.

진화적 적응 환경

진화적 적응 환경(EEA)이라는 용어는 발달 및 애착 형성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파악한 보울비가 처음 사용하였는데, 인류 진화 중 현재와 같은 EPM들이 형성된 시기, 즉 현대인과 같은 심리 기전 세트를 갖춘 인류가 형성된 시기를 말한다. EEA는 흔히 수렵 채집인의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 Epoch, 홍적세 또는 최신세) 환경이라고 간주한다. 플라이스토세는 200만 년 전부터 1만 2천 년 전까지의 기간으로 이 기간 중 4회 또는 6회의 빙하기와 간빙기가 있었다. 이때 형성된 EPM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 없이 유전되었다고 보는데, 일부 질병의 궁극적 원인은 EEA 이후 발생한 급격한 환경 변화를 EEA에 고정된 EPM이 따라잡지 못해서 생긴 진화적 지체로 볼 수 있다고 해석된다.
EEA가 가깝게는 1만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으므로 이 기간 동안 눈에 띄는 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간주하지만, 이 기간은 인간에서 300~500세대에 해당하는 시간으로, 진화에 의한 유전자 풀 변화가 일어나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다. 가축의 경우 수십 년이면 선택적 교배를 통해서 새로운 품종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물론 인류의 한 세대가 가축들보다 훨씬 길고 선택 압력이 가축을 교배할 때보다 훨씬 적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진화의 속도가 그보다는 느리겠지만, 인간 집단에서 목축 문화에 따라 유당분해효소 대립유전자 분포가 바뀌는 데는 5천 년이면 충분하였다.17) 따라서 EEA 이후 EPM이 변하지 않았다는 가설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인류가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유전자 변이뿐만 아니라 비유전적-문화적 진화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문화의 발전에 의한 환경 조절이 진화적 압력을 낮추어 유전자 및 EPM 진화의 속도를 늦추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다가 문화적 대처로 환경 변화를 따라잡지 못할 상황이 된다면, 진화적 지체를 안고 있던 EPM 기반 행위의 적합도는 크게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론과 목적론

진화는 목적론이 아닌 결과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적합도가 높기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표현형-유전형의 적합도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적 설명을 하다 보면 흔히 목적론을 연상시키는 논의에 빠지게 된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용어는 의인화를 통해 마치 유전자가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개체들을 조작해서 그 의지가 실천되는 과정이 진화인 것 같은 함의를 갖게 하였으나 이렇게 파악하면 큰 왜곡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화 설명이 매력적인 것은, 의인화하려는 경향 자체가 우리 인지구조에서 하나의 EPM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마주하는 대상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어야(마음이론) 그 대상과 더 적합도 높은 상호작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결과론보다 목적론을 더 잘 받아들이는 것은 합리적 추론이 발달한 우리의 인지적 특징과도 관계될 것인데 이 특징도 EPM에 속할 것이다.
진화가 결과론이라는 것은, 진화는 일회성이고 목적을 미리 상정해서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어떠한 행위들이 필요한지를 추론해 낼 수는 있지만(목적론), 구체적 전략은 여러 가지가 가능하므로 실제 어떤 행위들이 나타날지는 미리 예측할 수 없고 오직 결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결과론). EPM은 엔지니어가 기계를 설계하듯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연히 창발된 특정 기전이종의 생존 가능성을 더 높여주었기 때문에 그 기전을 물려받은 개체가 종 내에서 늘어난 것에 불과하다. 결과론은 또한 EPM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능한 최적의 방법으로 설계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최적인가가 아니라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있는가이다. 더 좋은 기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다른 기전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면 집단 내에 전파될 가능성은 낮다. EPM이 어떤 의도를 따라 최적으로 설계된 것이라면 경쟁도 없고 유전적 다형성도 없어서 더 이상 진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환경의 요구에 따라 꼭 필요한 만큼만 진화되어 다양한 대립유전자들이 살아남는 것은 진화 및 유전적 다양성을 위해 중요하다.
생물학적 진화뿐만 아니라 문화의 진화 역시 목적론보다는 결과론적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매년 패션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유행(밈)을 예측하려 하지만, 예측 가능한 범위는 제한적이고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것이 유행한 뒤에 그 원인에 대한 사후 설명만 할 수 있을 뿐인데 이 설명은 목적론을 가장하지만 실제는 결과론에 대한 합리화이다.
결과론으로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이 갖는 문제점이다. 자연과학의 합리성은 인과적 설명을 추구해서 법칙을 만들고 그에 근거해서 새로운 현상을 예측하는 것인데 진화론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대개의 경우 실험적 조작이 불가능하고,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독립 변인이라 상정되는 것을 과거에 가졌던 집단과 그렇지 않았던 집단의 현재 상태를 비교하는 방식의 연구를 하게 되는데, 이런 후향적 방식은 한계를 갖는다. 전향적으로 실험적 조작이 가능한 경우는 박테리아 등 한 세대가 매우 짧은 생명체에 국한된다. 물론 인간은 목적론적으로 진화를 일부 디자인하기도 한다. 가축의 품종 개량이나 유전자 조작작물(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이하 GMO) 등이 그것으로, 유전형 및 표현형 변화의 방향은 개발자의 의도에 의해 미리 설정된 상태이다. 그런데 합목적적으로 GMO의 형질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GMO에 대해 항상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GMO가 그것을 디자인한 사람들의 의도에 따른 것 이외의 예측할 수 없었던 다른 표현형을 발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진화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서서히 일어나는 변화인데 반해 목적에 의거한 설계는 중간 검증 과정이 없다.

정신의학의 틀과 진화론

진화론과 역동정신의학

진화생물학적 접근은 실험적인 조작이 쉽지 않고 현대 자연과학이 요구하는 엄밀한 반증 가능성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접근법이 임상 정신의학에서 유효한 것은, 임상 의사로서 우리가 환자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이 “이 환자가 왜 이런 행위를 할까?”에 대한 궁극적 해답이기 때문이다. 환자가 난폭 행위를 보이는 것은 환자 편도체의 활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가설보다는 환자가 욕구를 충족시킬 대상을 확보하려 투쟁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임상의에게는 더 유용한 작업가설이 된다. 이때 대상 확보 가설은 진화생물학적이며 행위의 궁극적 원인에 대한 것인 반면, 편도체 이상 가설은 생의학적 관점에서 본 근접원인에 대한 것이다. 궁극적 ‘원인(caus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현상학적 입장에서 보면 ‘이유(reason)’에 가까운데26) 임상 정신의학자에게 궁금한 것은 환자가 이런 행위를 하는 이유이지 이런 행위로 귀결지어진 뉴런 내 분자의 역동이나 뇌 부위 간 연결도의 변화가 아니다.
그런데 행위에서 근접 원인이 아닌 궁극적 원인을 찾으려는 것은 일찍이 역동정신의학이 시도하였다. 역동정신의학은 병적이라 간주되는 행위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생성론적 접근을 추구한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시점의 증상을 넘어서, 개인이 이런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발달과정을 탐구해야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발달적 접근은 일차적으로 개인 수준의 것으로, 개인의 발달사를 알아야 개인의 현재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토템과 타부(Totem und Tabu, 1913)27)에서 진화론과 정신분석적 사고를 통합하려 한다.28) 프로이트가 실수의 원인으로 지목한 무의식은 행위의 근접 원인에 대한 것이지만, 자아 형성의 발달적 이해는 그런 이상 행위가 일어나는 궁극적 원인에 대한 추구가 된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대상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발달기에 “관계에 대한 욕구가 좌절된 것”과 관계된다고 보았는데, 이 욕구 좌절은 두려움의 근접 원인이라기보다는 궁극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 궁극적 원인을 찾기 위한 작업이 정신분석이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은 인류라는 종의 차원에서 특정 행위 또는 심리적 상태를 이해하려는 접근법이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에 국한된 측면이 강한 프로이트의 발달적 이해는 여전히 궁극적 원인에 이르지 못한 것일 수 있다.29) 그런데 욕구 좌절의 체험이 개인의 발달기에 실제 일어났던 것이라면 근접 원인에 가깝겠지만, 이것이 개인의 실제 체험이라기보다는 진화를 통해 인류의 유전자에 각인된 것이라면 궁극적 원인이라 할 것이다. 이는 고양이를 체험해 보지 않은 쥐도 고양이 냄새에 공포반응을 보이는 것30)과 같다. 그 개체가 어려서 고양이에 노출되었을 때 학습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고양이에 공포반응을 보이는 개체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현재의 쥐도 선험적으로 고양이를 두려워한다는 것이 쥐의 고양이 공포증의 궁극적 원인이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Oedipus complex)는 개인들이 발달기 실제 체험한 결과라기보다는 선조들의 생존과 관계된 체험들이 선택되면서 특정 문제에 특정 양식으로 행동하려는 경향, EPM이 되어 유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훌륭한 통찰을 주지만, 프로이트 자신이 의식적으로 진화론적 담론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29)
행위의 진화생물학적 해석에 더 가깝게 접근한 분석학자는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다. 융의 집단 무의식(archetype)은 진화심리학이 태동되기 반세기 이전에 제시된 개념이지만 현대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EPM과 매우 닮아있다.31) 집단 무의식에는 인류의 오랜 발달사가 축적되어 있고, 그것은 선험적이며,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이고, 특정 행위의 궁극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개인의 병적 또는 정상행위, 인구집단에 흔히 일어나는 행위 등을 궁극적으로 이해하려면 집단 무의식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융의 설명인데, 이 입장은 진화정신의학과 일치한다.

정신의학 진단분류체계의 진화

DSM 및 ICD 등 정신의학의 도구적 진단분류체계는 수십년간 학계에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단이 질병을 자연적 군(natural class)으로 동정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문제 때문에 비판받고 있다. 시스템적 고려 없이 순수한 기술(description)로 구성한 시스템이 갖는 한계일 것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 중 하나가 미국 정신보건원(NationalInstitute of Mental Health, 이하 NIMH)의 Research Domain Criteria(이하 RDoC)이다.
RDoC는 NIMH 전략 계획 1.4에 따라, “관찰 가능한 행위와 뇌 기능의 차원에 근거한 정신질환 분류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시행된 프로젝트이다. RDoC는 진단이 아닌 기본적 기능들 및 이 기능들에 접근할 수 있는 연구 기법들을 제시하여 정신질환 연구를 위한 새로운 틀을 설정하려 한다. 정신병리에 의거한 카테고리적 분류라는 전통적 방법이 아닌 기본적 기능들의 조합으로서 질병 상태를 이해하고여기 접근을 위한 도구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RDoC 자체는 질병 분류 체계가 아니라 정신기능 분류 체계이므로 임상적 질환을 직접 다루는 것은 아니다. RDoC의 정신기능 축은 가장 큰 분류인 다섯 가지의 도메인(domain)과 그 밑에서 각도메인에 소속된 세부 기능인 구성체(construct) 및 하부구성체(subconstruct)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정신병리학 용어가 아닌 정신기능과 관계된 용어로서 표시된다. 다섯가지 도메인은 Negative Valence Systems, Positive Valence Systems, Cognitive Systems, Systems for Social Processes, Arousal/Regulatory Systems이다(https://www.nimh.nih.gov/research-priorities/rdoc/index.shtml). RDoC 체계는 진화심리학보다는 인지신경과학에 더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현재 진단체계의 출발점인 정신병리가 아닌 더 기본적인 정신기능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행위에 대한 궁극적 접근에 조금 더 다가서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행위에 대한 더 궁극적인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진화심리학에 근거한 도메인을 갖는 분류체계가 필요할 것이다. 이 체계는 RDoC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인간 행위 시스템에 접근하게 된다. 예컨대 인간 행위의 동기가 되는 네 가지 궁극적 시스템으로 생존, 번식, 혈연에 대한 도움, 비혈연에 대한 호혜(reciprocation)를 설정한다. 각 시스템에 대해 행위의 목표 설정(motivation-goals), 내외적 정보를 선택(automatic systems), 그에 의거해 행위를 디자인(algorithms), 디자인된 행위의 실행(functional capacities)이라는 구성체를 설정한다. 그리고 여기에 EPM에 속하는 각종 기전들을 소속시킨다.3132) 이 시스템 아래서 정신병리는 1) 어떤 EPM에 의거하며, 2) 이것이 어떤 조건에서 행위 또는 주관적 체험으로 발현되고, 3) 어떤 조건에서 그 발현이 병적이라 여겨지는가에 따라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33) 이와 다른 방식으로, 진화적 근원에 따라 개체 간 상호작용의 방식을 분류하고 배치하여 정신병리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Stevens와 Price31)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뒤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질병의 생의학적 및 진화적 모델

정신질환의 규범성

어떤 상태가 질병이라는 것은 자연적(naturalistic) 또는 규범적(normative)으로 정의될 수 있다.34) 자연적으로 정의될 때 질병은 사회적 가치와 관계없는 자연적-생물학적 카테고리에 의해 규정된다. 반면 규범적으로 정의될 때 건강과 질병의 경계는 자연적 조건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 등 규범화된 요소의 영향을 받게 된다. 정신질환이 항상 자연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지는 논란이 있다. DSM-III가 제정되면서 동성애가 정신질환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35)은 정신질환이 규범적으로 정의됨을 보여주었다. 물론 정신질환만 규범적으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비만이나 폐경기 이후의 골밀도 저하에 질병 개념이 도입된 것은 자연적 입장, 즉 집단 평균을 생물학적 정상으로 규정하는 것보다는 규범적 입장, 즉 제약산업 발전을 포함하는 사회문화적 요소가 반영된 것이다. 이렇듯 질병 상태를 정상과 구분해 정의하는 것이 쉬운 문제는 아니다. 특히 정신의학 분야에서, 문화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질병이라 규정하는 것은 자연적 입장만으로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현대 정신의학의 도구적 진단체계 역시 자연적이기보다는 규범적이다.36) DSM-5에서 정신질환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37)
1)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정신적 기능부전(dysfunction)
2) 의미 있는 고통(distress)이나 활동상의 장해(disability) 정신질환에서 제외되는 조건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3) 예견되는 또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반응
4) 정치, 종교, 성 등의 일탈 행동 및 일차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갈등으로, 1)의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닌 것
1)의 기능부전이 어떤 것인지는 특정 질병(진단명)에 고유한 것으로, 각 질병 별로 진단기준 항목에 제시된다. 이 기준에 속할 잠재적인 항목들은 현장 연구라는 자연적 방법에 의해 찾아졌지만, 항목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각 질환별 태스크포스 전문가들의 합의였으므로37) 결국 규범성을 띨 수밖에 없다. 진단 기준이 규범과 관계됨은 3)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자연적이 아닌 규범적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4)는 3)보다 더 넓은 범위를 정상으로 간주하는 규범적 조항이다. 2)는 어느 수준의 고통이나 장해가 있어야 병으로 보느냐의 문제인데, 이 역시 생의학적 평가보다는 가치 평가와 관계된다.38) 예컨대 인터넷 게임 장애가 DSM-5의 부록에 수록되었다. 이 상태 역시 특정 행위 목록과 함께 고통 및 장해에 의해 정의된다. 그런데 이 고통 및 장해에 대한 판단은 사회적 규범에 의존한다. 학생이 학교에 가지 않고 게임을 한다면 문화권을 막론하고 기능 장해라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학원을 빼먹고 게임하는 것이 얼마만큼의 장해인지는 그 집단에 어떤 규범이 통용되는가에 따라 또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학생이 병적 수준의 장해를 갖는다고 보는 학부모가 많겠지만, 학생 자신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과외 학습의 요구가 없는 사회에서는 이것이 문제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반정신의학(antipsychiatry) 운동이 정신의학을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기본적인 근거는 정신질환이 규범적으로 정의된다는 점이었다.39) 규범은 자의적인 가치판단을 포함하므로 과학이 아니다. 물론 임상적으로 유용하기 위해서 질병이 꼭 자연적으로 정의되어야 하는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규범이 과학으로 위장하고 나타나는 경우 개인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반정신의학 운동이 우려하는 바이다. 이런 극단은 아니더라도, 어떤 진화정신의학 문헌은 질병이라 지칭하는 것 자체가 갖는 왜곡된 함의를 우려하여 정신질환들을 질병이 아니라 ‘상태(condition)’라 부르기도 한다.32) 상태들은 자연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으로, 규범적 판단의 영향을 받는 질병 개념과는 다르다.

생의학적 모델과 진화적 모델

질병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자연주의적 모델은 병인-환경-숙주 세 요인 간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병인론이다.40) 이 모델은 특히 감염병에 잘 적용된다. 숙주 요인은 특정 질병에 대한 취약성이며, 병인은 숙주의 구조와 기능을 파괴할 수 있는 요인이다. 환경은 두 요인 간의 접촉 가능성과 관계된다. 질병은 병인이 숙주에 침투하는 상태로, 병인이 유발하는 질병 과정 또는 숙주 취약성의 생리학적 근거에 대한 정적(static), 생의학적 연구가 질병을 이해하는 길이다.
반면,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질병은 세대가 경과하면서 변천하게 되는 숙주와 병인 간의 동적(dynamic) 상호작용이라 이해할 수 있다. Nesse와 Williams41)는 우리는 왜 병드나(Why we get sick, 1994)41)에서 감염병을 병인과 숙주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승리를 위해 경쟁을 하는 것으로 본다. 이때는 “질병 과정 및 방어 과정이 생의학적으로 어떤 것인가”보다 “병인과 숙주 간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나타나고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어떤 질병이나 숙주는 이 전쟁 과정에서 멸종됨으로써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중세 유럽의 페스트(plague) 유행의 예에서 보듯이, 치명적 감염병은 선택 압력을 매우 높임으로써 단기간에 숙주 유전자 풀의 변화, 즉 진화를 유발하여 질병에 저항성을 가진 집단으로 만들고, 이렇게 되면 전쟁은 끝나지 않고 지속하게 된다. 병인도 진화하여 진화된 숙주를 공격할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병인은 생물체가 아닌 사회문화적 구성체일 수도 있다. 항생제 내성을 갖는 병원균의 경우, 병원균 입장에서 항생제는 병인이 되며 여기에 반응하여 진화한 병원균은 항생제 저항성을 가진 것으로 살아남게 된다. 병인이 되는 항생제 역시 제약산업이라는 문화적 방법을 통해 진화하므로 전쟁은 지속된다. 병인과 숙주의 관계가 별로 극적이지 않은 현대의 만성질환에서는 생의학적 모델보다는 이런 모델이 질병의 발생을 이해하는데 더 유용하다.41)

진화적 모델의 함의

정신의학에서 병적인 것과 정상인 것을 구분하기 어려운 기본적인 이유는 병적이라 지칭되는 행위의 기반에 진화를 통해 우리가 획득한 EPM이 있기 때문이다. EPM의 발현으로 나타나는 행위들은 어떤 조건하에서는 정상으로 간주되고 다른 조건하에서는 비정상으로 간주되는데, 이 조건은 특정 행위를 유발하는 생의학적 요소(병인)이거나 사회문화적 환경일 수도 있고 발현된 행위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사회문화적 규범일 수도 있다. 이때 진화론은 상태들의 ‘질병성(disease-ness)’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신질환을 진화론적으로 정의할 것을 주장한 학자로 Wakefield42)가 있다. 그의 이론에서 정신질환은 ‘해로운 것’과 ‘자연적 기능의 파괴’라는 두 요소를 포함한다. 무엇이 해로운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규범이 동원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정신질환은 자연적이 아니라 규범적으로 정의된다고 볼 수 있지만, 자연적 기능이란 ‘진화를 통해 선택된 대로 기능하는 것’이므로 그 파괴는 자연적 정의가 가능하다. 즉, 자연적 기능과 그 파괴를 파악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진화론이다. 물론 진화적 관점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가치판단의 개입 없이 온전히 자연적 입장에서 기능 파괴를 정의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있다.38) 진화가 일어난 환경 자체가 자연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환경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예로 든 인터넷 게임 장애를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중독과 관계된 EPM들은 어떤 대상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것과 관계된다. EPM들이 형성되던 EEA 시기에는 인류의 추구 대상이 생존-번식에 직접 관계된 것들밖에 없었고 인류가 취미 생활을 추구할 여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로 생산성이 높아져서 여가를 가질 수 있게 된 뒤에는 필수적이지 않은 대상을 향해서도 이 EPM이 발현되었을 것이다. EPM은 ‘무엇을’이 아닌 ‘어떤 역할을 하는’ 대상을 ‘어떻게’ 추구하는가와 관련된 기전으로, 대상이 인터넷 게임인지 대마초인지 록밴드인지는 문화 의존적이다. 이 집중적 추구가 얼마나 기능을 떨어뜨리고 고통이 되는지도 문화 의존적이다. 대마초가 합법인 사회와 불법인 사회에서 대마 사용에 의한 사회적 기능장애는 크게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인터넷 게임이라는 새로운 병인이 나타나서 숙주를 공격하여 새로운 병이 생겼다고 보는 것은 근접 원인에 대한 생의학적 설명이다. 반면 인간의 마음은 중독이 될 수 있도록 진화되어 있고 어떤 자극은 이것을 무임승차하여 집중적 추구라는 상태를 일으키는데, 2010년대 우리나라의 문화에서 이런 대표적인 자극은 인터넷 게임이라고 하는 것이 궁극적 원인에 대한 진화적 설명이다. 이때 상태(질병)는 EPM이라는 자연적 근거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

진화적 병태생리학

적합도를 심하게 떨어뜨리면서 투과율(penetrance)이 높은 유전자는 진화 과정에서 이미 퇴출되었고 그에 기반한 EPM도 진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까지 살아남아서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들은 현재 적합도가 낮은 부적응적 행위로 발현되더라도 종과 타협을 이룬 것들이라 볼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질병 대립유전자의 적합도가 아주 조금만 낮고 불완전 투과한다고 하더라도 이 대립유전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하여 결국 퇴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적합도 최고가 아닌 모든 대립유전자들은 다 퇴출되고 현재 인구집단은 유전자 다형성이 없거나 다형성이 있더라도 똑같은 적합도를 갖는 중립적 대립유전자들로 구성되어야 하겠지만, 여전히 인류는 유전자 다형성을 가지고 있으며, 유전자 연구들은 이 중 몇 가지를 ‘질병유전자’로 지목하고 있다. 그렇다면 적합도 낮은 표현형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어떻게 선택에 의해 제거되지 않고 현재의 인류에게 전달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전자 표류와 근중립성

조현병 등 주요 정신질환은 개체의 적합도를 떨어뜨린다. 그런데 대규모 유전학 연구들의 공통된 결론은, 주요 정신질환들은 효과 크기(effect size)가 매우 작은 유전자들 다수의 조합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들 개개의 질병유전자의 적합도는 다른 대립유전자의 적합도보다 낮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들이 진화의 과정에서 퇴출되지 않았을까? 유전자관점에서 보자면, 환자라는 개체에서 병으로 손실된 적합도를 보충하는 다른 기전이 있어서 적합도가 유지되어야만 다른 대립유전자들과 평형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근중립성(near neutrality)이론은 인구수가 유한하고 완전 무작위 교배가 일어나지 않는 현실적 인구집단에서 적합도의 감소가 크지 않은 유전자는 중립적으로 전달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적합도에 근거한 선택을 중요시한 다윈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1960년대에 Kimura 등에 의해 분자 진화의 중립성(neutrality)이론이 제기되었다. 돌연변이와 적합도에 의존한 선택만이 진화의 요인이 아니라 적합도가 서로 같은(중립성) 대립유전자들 간의 무작위적 선택(유전자 표류, genetic drift)이 분자 진화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주장이다. 이 가설의 타당성은 다양한 생물의 단백질 및 핵산 염기서열에서 검증되었다. 물론 명백하게 적합도가 떨어지는 대립유전자는 뒤에 설명할 별도의 생존전략이 없다면 선택의 과정에서 퇴출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상당수의 유전자는 이 두 극단의 중간에 속한다. 유전자들은 적합도에 일부 관여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으며, 완전히 중립적이어서 표류에 의해서만 운명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거의 중립적인 대립유전자들의 분자진화에 대해 Ohta43)는 근중립성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근중립성 모델에서 한 대립유전자의 운명은 적합도뿐만 아니라 인구군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인구군이 작으면 선택보다는 표류의 효과가 크다. 인간 집단은 한 교배권 안에 유한한 인구군을 가지고 진화되어 왔으므로, 별다른 보상의 기전이 없더라도 적합도를 일부 감소시키는 대립유전자들은 표류에 의해 유지 가능하다. 물론 표류가 진화의 주된 동인이 되므로 대립유전자들의 빈도가 안정상태는 아닐 수도 있지만, 일방적으로 감소하여 유전자 풀에서 퇴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근중립성은 집단에서 유전자 다형성이 유지되는 중요한 기전이 된다. 적합도가 유전자 풀의 구성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라면, 가장 적합도 높은 대립유전자만이 살아남아 그 집단에서 유전자 다형성은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적합도는 환경에 의존하기 때문에, 유전자 다형성이 없는 집단은 환경 변화에 매우 취약할 수 있다.
조현병처럼 적합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질병의 유전자들이 근중립성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면, 발병 여부는 결정적인 몇개의 유전자가 아닌 많은 수의 작은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구군에서 발병을 않은 개체들도 병적 대립유전자를 다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들 개개의 효과는 별 것 아니지만 보유한 병적 대립유전자 개수에 따라 어떤 연속적인 기질(trait)이 나타나고, 이것에서 임의의 절단점을 설정한 것이 질병이라는 모델이 성립한다.44) 다유전자(polygenic) 모델의 일종이 될 것인데, 이때 질병에 조금씩 관여하는 개개의 대립유전자를 ‘질병’ 유전자라 지목하기에는 애매하다. 정상인들도 이 대립유전자들을 다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유전학 연구로 찾아내는 유전자의 다수는 이런 종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보상적으로 적합도를 높이는 기전을 따로 갖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질병유전자의 생존은 가능하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진화의학 문헌들은 현재의 질병 또는 질병유전자가 EEA 시기에 별도의 생존전략을 가졌을 것이라 가정하고 그 기전에 대한 가설들을 내세우고 있다. 이와 관계된 주된 논점들은 아래와 같다.

질병유전자의 생존전략

근중립성을 따르는 유전자는 질병 유발에 의한 적합도 저하를 보상할 다른 기전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적합도 감소를 더 크게 일으키는 유전자들은 적합도를 보충할 다른 기전을 갖는다. 이에 대해 몇 가지 기전이 제안되고 있다.32) 각 기전들이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다표현형(Pleiotropy)

한 유전자가 다양한 표현형을 발현시키는데, 이 표현형 중 어떤 것은 적합도를 높이고 어떤 것은 적합도를 낮게 한다. 각 표현형의 적합도는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인구집단에서 환경에 따라 이 대립유전자의 생존이 결정된다. 예로서 겸상 적혈구(sickle cell) 유전자는 적혈구 파괴를 일으키므로 적합도가 낮지만 동시에 말라리아에 대한 내성을 높임으로써 적합도를 높이는 기능도 있다. 따라서 말라리아가 흔한 환경에서, 이 대립유전자는 집단 내에 일정 비율로 살아남게 된다. 그런데 말라리아가 없는 환경에서는 후자의 표현형에 의해 증가하는 적합도가 없으므로 이 유전자는 낮은 적합도만 가지게 되어 결국 퇴출된다. 정신질환을 이런 유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도 있다. 예컨대 우울증은 증상군 자체로 개체의 적합도를 떨어뜨리지만, 타인이 가진 자원을 자신에게 주도록 만드는 기능도 있음으로써 타인에 대한 협조가 규범인 문화적 환경하에서는 증상에 의한 적합도 감소가 상쇄되어 우울증 표현형 및 관련 유전자가 보존된다는 식의 설명이다.45)

돌연변이(Mutation)

돌연변이에 의해 심각한 비적응적 표현형이 발생하는 경우 환자의 유전자는 적합도가 낮아 유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질병을 갖는 개체는 정상적 개체의 생식세포에서 배아가 만들어질 때의 변이를 통해 생성되므로 계속 나타날 수 있다. 염기서열 반복과 관계된 신경계 질환(헌팅턴 병) 등에서 이런 현상이 보인다.46) 이런 질병이 꾸준히 존재하려면 해당 돌연변이 역시 꾸준히 일어나야 하므로, 이 경우 실제 질병유전자라 할 수 있는 것은 ‘생식세포에 그런 변이를 일으키는 성향’과 관계된다. 그런데 이와 관계된 유전자들이 근중립적이라면 세대를 거쳐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번식 및 후손 양육이 끝난 뒤에 발병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경우는 적합도가 떨어지는 조건이 아니다. 후손 양육 후 발병하여 일찍 사망한다면, 번식가능한 인구군이 차지할 수 있는 자원이 증가하므로 오히려 이런 표현형의 포괄 적합도가 높을 수도 있다. 노인을 부양하는 문화가 발생하기 전의 치매는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동형접합(Homozygosity)

근친혼 등으로 유전자 다형성이 사라진다면, 결국 한가지 대립유전자만 남게 된다. 이 단일 유전자는 최선의 기능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환경이 요구하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경쟁하는 더 좋은 대립유전자가 없으므로 생존한다. 모든 개체가 같은 적합도를 가지므로 이 대립유전자를 병적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집단은 유연성이 적으므로, 환경이 변한다면 진화적 적응을 하지 못하고 멸종되거나 새로운 인구 유입 또는 돌연변이에 의해 구제될 것이다.

선조 중립성(Ancestral neutrality)

한 대립유전자(또는 EPM) 유래 표현형이 EEA에는 중립적 또는 선호되는 것이었지만, 환경이 바뀌어 현대가 되면서 이 표현형이 대립하는 표현형에 비해 적합도가 낮아질 수 있다. 현대는 EEA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므로17)이 대립유전자는 적합도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인구집단에 흔하게 분포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이 대립유전자는 서서히 퇴출될 것이지만, 유전학이 시작된 이후부터 현재까지라는 수십 년의 기간에 그 빈도의 감소를 확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명사회 질환의 다수가 선조 중립성으로 설명된다. 예컨대 대사증후군의 경우, 에너지 섭취가 부족하던 EEA 시기에 고 칼로리 식품을 선호하고 섭취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체내 저장하게 하도록 진화된 EPM이 에너지 섭취 과잉이 된 현대 사회에서 행위로 발현됨으로써 발생한다는 것이다. 대사증후군 환자는 자손의 번식은 가능하더라도 수명이 짧아져서 자손이 성년이 되어 다음 대를 이을 때까지 도와줄 기회가 줄어들거나, 날씬함을 선호하는 문화 하에서 성적 매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손을 번식시킬 기회 자체가 줄어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수천 년 뒤 대사증후군 관련 대립유전자는 인류에서 퇴출될지도 모른다. 물론 현대 문화에 비만 치료라는 밈이 나타남으로써 대사증후군 유전자의 적합도는 회복될 수도 있다. 이 경우 대립유전자 빈도는 변화 없지만 그 표현형인 대사증후군의 발현은 감소할 것이다. EPM의 행동적 발현이 문화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정신질환과 관계된 예를 들자면, EEA 시기에 포식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위험 자극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튜닝된 주의력 EPM이 자극 과잉의 현대사회에서는 정신병의 지각 과민성-관계관념이라는 정신병리로 표현된다는 해석이 있다.47)

포괄적합도(Inclusive fitness)

진화생물학자들은 개체의 적합도를 떨어뜨리는 유전자가 살아남는 기전에 대해 개체 수준의 적합도를 초월한 더 넓은 것을 찾으려 한다. 특정 표현형이 그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는 불리하지만, 유전자를 공유하는 친족의 적합도를 해당개체에서 감소하는 양 보다 더 상승시킬 수 있다면 그 유전자는 집단에서 선택될 것이다(포괄적합도에 대해서는 앞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해당 개체는 병을 가진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

특정 표현형을 가지는 것이 개체의 유전형뿐만 아니라 문화적 전승을 통해서도 결정되며, 적합도는 유전형과 관계없이 표현형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 각 유전형별로 그 표현형을 얼마나 잘 전수받는가에 따라 유전자 다형성이 결정된다. 집단 내 각 대립유전자의 분포 및 각 표현형의 분포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다가 특정 조건에서 평형을 이룬다. 시뮬레이션 조건에 따라서는 적합도가 매우 낮은 표현형도 퇴출되지 않고 퍼져나갈 수 있다.48)

한 개체의 적합도가 다른 개체의 대립유전자와 관계되는 경우

진화적 게임 상황에서 각 전략(대립유전자 또는 그에 의거한 표현형)을 갖는 개체의 비율이 평형을 이루어 어떤 개체도 자신의 전략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적합도를 증가시킬 수 없는 안정된 상태가 이루어질 수 있다.21) 집단 구성 초기에는 대립유전자 구성비가 요동하다가 세대가 지나면서 안정되면서 이 비율이 고정되는 것이다. 이 평형상태에서는 개체 수준에서 적합도가 낮은 대립유전자들도 일정한 비율을 차지할 수 있다(진화적 게임이론에 대해서는 앞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정신병리의 진화적 기원

앞서 제시한 전략으로 혹은 근중립성으로 살아남은 유전자들은 EPM의 기원이 되며, EPM들은 현대 인류의 행동적 표현형과 관계되는데, 이 표현형 중 어떤 것은 어떤 조건 하에서는 병으로 간주된다. 이를 살펴봄으로써 정신병리의 진화적 기원을 이해할 수 있다.

정규분포(Normal distribution)

문제가 되는 표현형은 작은 효과를 갖는 한 무리의 유전자들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이 표현형은 정량적으로 이항분포 또는 정규분포라 하는데, 분포의 극단에 속하는 개체들에서는 적합도가 떨어지는 행위로 발현된다. 분포의 한쪽 극단만 적합도가 떨어지는 경우에는, 반대쪽에 해당하는 개체만 선택적으로 살아남아 세대가 지나면서 대립유전자 분포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평균으로의 회귀(regression to the mean) 또는 개별 유전자의 근중립성 기전에 의해 분포가 긴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44)

유전자-환경 상호작용(Gene-environment interaction)

어떤 개체는 병에 걸리고 어떤 개체는 아닌가는 유전자 구성과 환경 요소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몇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1) 환경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데 그 결과로서 개체의 적합도가 달라질 수 있다. 진화의 역사를 통해 경험해 보았던 환경이라면 환경에 의한 유전자 발현은 적합도를 증가시키는 쪽으로 조절될 가능성이 높지만, 새로운 환경의 경우 그에 따른 유전자 발현 변화의 적합도는 미리 알 수 없다.
2) 유전자 발현 및 EPM은 변화 없지만 환경에 따라 EPM에 의해 구현되는 행위가 달라짐으로써 병적인 조건이 된다. 예컨대 생존에 필수적인 대상을 추구하는 EPM은 술을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문화 환경 아래서는 알코올 의존이라는 병으로 나타날 수 있다.
3) 유전자 또는 EPM의 표현형인 행위 자체는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더라도 행위의 적합도는 환경, 특히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다.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가치평가에 따라 그 개체의 사회인으로서의 적합도가 달라지고 이것이 낮은 경우 병으로 간주할 수 있다. 정신질환이 규범적으로 정의되는 것과 관계되는 현상이다.

다수준 심리 기제의 활성화 및 억제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행동들과 환경은 다양한 수준에서 상호작용한다. 예컨대 한 환경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여러수준의 행동들(단순반사, EPM에서 기원한 행동적 대처, 문화적 맥락에서 학습된 행동 등)이 있을 수 있다. 실제 반응은 이들의 다양한 조합으로 나타나는데 한 수준에서의 대처가 잘 이루어지면 다른 수준에서의 대처가 필요 없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 다른 수준에서 반응을 해야 하는데, 이 반응은 적합도가 떨어져 병리라 불리는 상태가 나타날 수도 있다. 예컨대 위협하는 세력이라는 자극에 대해 적합도가 가장 높은 대응이 적당히 협조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잘 안될 때 나타나는 반응인 정동 불안정과 우울은 병으로 간주된다.31)

사회적 항상성(Social homeostasis)

인간은 EEA 시기부터 이미 집단을 형성하여 살아왔다. 친족들의 적합도를 높이는 이타적 행위를 유발하는 대립유전자가 인구집단에서 다른 대립유전자와 평형을 이룬다면, 그 대립유전자를 발현하는 개체 자신의 적합도는 다른 대립유전자를 가진 개체에 비해 낮을 수도 있다. 포괄적합도 논의를 뒤집어 본 것이다. 이렇게 적합도가 낮아진 개체는 병을 가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우울증 기전인 ‘자신에게 향함(turning to the self)’은 당사자에게 중요한 다른 사람의 심리적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지만, 그 자신에 심리적 부담을 지움으로써 우울증이라는 적합도가 낮은 상태에 이르게 한다.31)

개체발달론(Ontogenetic theory)

개체의 발달 과정에서 받은 영향은 학습을 통해서건 뇌에 대한 기질적 영향을 통해서건 성장한 이후의 행동 경향을 결정할 수 있다. 이때 정신병리는 현재의 환경-개체 상호작용 결과가 아닌 과거 상호작용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상호작용은 진화적 배경을 가진 것일 수 있다. 개체 수준에서 보면, 유전자-환경 상호작용은 어린 시절에 일어났지만 그 결과는 현재의 행위들로 나타나고, 이중 어떤 것은 적합도가 떨어질 수 있다.31)

정신병리의 진화적 차원 모델

개별 정신질환에 대한 진화생물학적 설명들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의 정신과 분류 자체가 체계성이 없기 때문에, 진화적 설명들도 체계를 갖추기보다는 개개의 현상에 대한 표면적 분석에 그치고 있다. 그런데 Stevens와 Price31)는 진화생물학 관점에서 차원적인 정신병리 체계를 구축하려 시도한다. 그들은 특정 질병 또는 증상이 아닌 서열(rank, 경쟁적 상호작용) 및 애착(attachment, 협조적 상호작용)이라는 두 기능을 한 축으로 하여 사회적 행동 및 관련된 정신병리를 이해하려 한다. 경쟁은 다윈주의적 선택의 기본적 동작 방식이고, 협조의 진화적 가치는 진화생물학에서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상반되는 두 상호작용 방식은 스펙트럼으로 볼 수 있는데 행위 및 정신병리들은 이 선상에 배열될 수 있다.
서열은 경쟁의 진화적 역사를 반영한다. 먹이, 영역, 짝 구하기 등을 위한 경쟁은 동물생태학자들이 제의적 투쟁행위(ritual agonistic behavior)라 부르는 개체 간의 싸움으로 나타나는데, 진화적으로는 애착 행위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파충류에서부터 관찰된다. 경쟁에서 이기면 그 개체는 서열이 올라가고 자원 확보 능력 및 자기효능감이 높아진다.31)지는 개체는 복종하거나 집단에서 사라진다. 경쟁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한 가지는 서열 높은 자가 낮은 자의 복종을 요구하는 적대적인 경쟁인 agonic 경쟁(지배 vs. 복종)이며, 다른 하나는 끌림을 매개로 하여 상대가 나를 돕도록 하는 hedonic 경쟁(사회적 통합 vs. 격리)이다(Stevens와 Price31)에서 재인용).49) 하나는 상대방에게서 자원을 빼앗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자원을 나누어주도록 유도하는 방법인데, 전자는 오래전에 유전자에 씌어진 기전으로 사회적 맥락과 큰 관계없이 동작하며, 후자는 진화적으로 훨씬 뒤에 개발된 것으로 제대로 동작하기 위해서는 집단생활의 시스템이 발달되어 있어야 한다. Agonic 경쟁은 다시 두 종류로 구분되어 적극적 공격행위가 나타나는 경우는 agonistic 경쟁이라 하고, 서열이 이미 정해져서 실제 공격행위 없이 하위자가 복종하는 경우를 agonic이라고 지칭한다. 이들은 진화의 역사에서 순서적으로 발생하였다. Agonistic 경쟁은 3억 년 전부터 개체 간 상호작용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행위 양상은 주로 유전자에 의존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agonic 경쟁 방법이 발생하여 싸움에 의한 자원과 개체 자신의 파괴를 줄일 수 있게 되었으나 복종자는 여전히고통을 느끼는 상태가 된다. 그러다가 1천만 년 전 hedonic경쟁이 등장함으로써 경쟁의 비용이 더 감소하였고, 마지막으로 애착-이타성으로 이어지는 상호작용 형태가 나타났다.49) 애착은 출산 후 자식을 양육하는 조류 및 포유류에게서 관찰되는 행위로, 부모 개체의 적합도는 낮아질 수 있지만 번식이 성공할 확률을 크게 높임으로써 포괄적합도를 크게 높이는 행동 양식이다. 여기서 더 나아간 이타성은 인류문명에 의해 백업되는 행동 양식으로 인류의 적합도는 더 높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타성 행위 모드는 모든 문명사회에서 전수되는 밈이 되었다. 요약하면 진화된 시기에 따라 다음과 같은 스펙트럼을 그릴 수 있다.
Agonistic-Agonic-Hedonic-Attachment(Cooperation)
Stevens와 Price31)는 상호작용의 각 단계와 관계 깊은 정신병리 현상을 제시하는데 예컨대 agonic 경쟁과 관계된 병리로 강박장애 및 내인성 우울증 등을, hedonic경쟁과 관계된 것으로 수치심과 죄책감을 들고 있다. 애착적 상호작용의 문제와 관계된 것으로는 경계선 인격, 중독, 성도착 등을 예로 들고 있다. 각 행동 양식 간에는 서열이 반영되어 hedonic경쟁과 관계된 상황을 다루는데 실패하면 agonic 경쟁에 사용되던 반응이 나타나는데 이 반응은 정신병리로 반영된다.

진화적 적응기능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병리

질병에 대한 진화론적 이해는 “질병은 정상과 구분되어 새롭게 발생하는 병태생리 과정에 의한다”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지만38) 반대로 “모든 질병 현상은 원래 적응적 가치를 가졌었다”는 또 다른 극단도 타당하지 않다.25) 진화가 찾는 해답은 이상적인 최적이라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절한 수준이다.32) 따라서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동원될 수 있거나 환경이 바뀌더라도 그대로 잘 적용될 수 있는 슈퍼 정답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예컨대 우리의 척추는 4족 보행에 더 적절하게 진화되었다. 인간이 2족 보행을 하면서 추간판은 압력을 받게 되고 결국 추간판 탈출증이라는 병이 생도가 높았었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다만 4족 보행시는 추간판이 큰 압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추간판이 압력을 잘 견디도록 진화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질병은 과거적응적이었던 표현형이 변화된 환경 때문에 낮은 적합도를갖게 된 것이 아니라, 변화된 환경이 그동안 겪지 못했던 새로운 과제를 제기했고, 진화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미리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족 보행 이후 추간판의 내성은 선택 압력이 되었으므로, 향후 인류의 진화가 진행된다면 추간판 탈출증이라는 질병은 없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질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추간판이 터지도록 진화했을까?”가 아닌 “어떤 조건에서 추간판이 터지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적절하다. 즉, 근접 원인을 탐구하는 생의학적 모델이 더 유용한 해답을 줄 수 있다. 물론 어떤 기능 또는 역기능까지가 진화적 디자인에 의한 것이고 어디부터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다소 자의적일 수 있다.

결론

전체 2부로 구성된 이 논문의 전반부에서, 저자들은 진화생물학 및 진화심리학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고, 진화론에 기반한 정신병리학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후반부에서는 주요 정신상태 및 정신질환을 진화생물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예들을 살펴볼 것이다.

Notes

Conflicts of Interest The authors have no financial conflicts of 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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