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In order to ensure the rights of medical self-regulation, what precondition should be fulfilled by the Korean Medical Association (KMA) or any other independent medical association or organization? Regulatory authority is defined as an exercise of legal power by the State for the rights and interests of the people. Thus, if Korean physicians seek to regulate themselves, on the one hand, the KMA or any other independent medical association or organization should achieve delegation from the State, and on the other, Korean medical professionalism should fully reflect the State philosophy.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origin and precondition of medical self-regulation in French State philosophy and French medical professionalism. For this purpose, the following topics are covered: (1) Who was involv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French State philosophy and what was the role of French physicians? (2) By whom and how was French State philosophy introduced in American State philosophy? (3) What medical ideas and values are included in the Declaration of Human and Civic Rights of 1789? (4) How is French State philosophy emblematized by three key values–freedom, equality, and fraternity–incorporated in French medical professionalism? Dealing with these topics, this paper claims, on the basis of French history and philosophy, that the most important precondition of medical self-regulation is for medical professionalism to sufficiently reflect the State philosophy, and consequently the KMA or any other independent medical association or organization representing Korean physicians should willingly be involved in shaping the Korean State philosophy.
대한의사협회나 다른 독립된 단체 또는 기구가 의료자율규제의 권한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규제 권한이란 기본적으로 국민의 권익을 위하여 국가가 특정인이나 특정한 단체 또는 기구에 행사하는 권력이다. 따라서 특정한 전문직 단체나 기구는 이 권한을 국가로부터 위임받아야 자율규제를 할 수 있다. 그런데 특정한 전문직 단체나 기구가 자율규제 권한을 위임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국민이 합의한 국가철학이 이 전문직 단체나 기구의 자율규제 규범에 반영되어 있어야 하고, 이 규범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음을 국민과 국가에 지속적으로 입증하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의사가 의료자율규제를 하려면 의사를 대표하는 대한의사협회나 다른 독립된 단체 또는 기구가 국가로부터 규제 권한을 위임받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나라 의사의 전문직업성이 우리나라 국가철학을 충분히 반영하여야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 의사의 전문직업성에 반영되어 있는 국가철학은 과연 어떻게 수립되었는가? 역사적으로 추적하여 보면 우리 의사전문직업성에 영향을 준 근대국가 이념은 암묵적으로 세 경로를 통하여 도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우리나라 국가철학과 의사전문직업성의 수립에 영향을 준 근대국가 이념은 19세기 가톨릭이나 개신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기관을 설립하거나 의사를 양성하면서 기독교 종교이념과 함께 전파한 프랑스와 미국의 국가철학이다. 프랑스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국가가 종교로부터 분리되어 세속화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톨릭 정신이 국가철학에 크게 남아있으며 이렇게 세속화된 종교적 가치는 프랑스 의사전문직업성에서 확인된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개신교 정신이 미국 국가철학과 의사전문직업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프랑스와 미국에서 세속화된 종교적 가치는 프랑스 인권 선언(1789)이 표방한 세 가치, 즉 자유, 평등, 박애로 계승되고 집약되었다[1]. 두 번째로 우리나라가 도입한 근대국가 이념은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에 이식된 일본 국가철학이다. 일본 국가철학은 상당한 부분이 19세기 독일에서 수용된 것이며 이것은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공표되고 유럽 전역에 전파된 프랑스 인권 선언이 반영된 것이다. 세 번째로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우리 의사전문직업성에 영향을 준 근대국가 이념은 18-19세기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헌법 정신이며 이것도 프랑스 인권 선언과 프랑스 국가철학을 상당히 반영한 것이다(Figure 1).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근대국가 이념 이외에 우리 의사전문직업성에 암묵적으로 수용된 국가철학을 추적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나 미국 국가철학보다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이 미미했던 것으로 평가받아온 프랑스 국가철학과 그 토대인 프랑스 인권 선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의료자율규제의 기원을 프랑스 국가철학과 의사전문직업성에서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1) 프랑스 국가철학의 수립에 누가 참여하였으며 의사는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파악하고, (2) 누가 어떻게 프랑스 국가철학을 미국 국가철학에 도입하였는지도 확인하고자 한다. 이어서 좀 더 구체적으로 (3) 프랑스 인권 선언에 함축된 의료이념을 분석하고, (4) 자유, 평등, 박애로 대표되는 프랑스 국가철학이 프랑스 의사전문직업성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의료자율규제의 조건이 의사전문직업성에 국가철학을 반영하는 것이고, 따라서 의사단체나 기구가 의료자율규제를 하려면 국가철학의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는 과제를 제안하고자 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수립된 프랑스 인권 선언과 국가철학은 몇몇 정치인만의 이념이 아니었다. 이 선언과 철학은 여러 전문직의 대표가 참여하여 수립되었고 카바니스(Pierre-Jean-Georges Cabanis, 1757-1808)와 같은 의사가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23]. 특히 프랑스에서 이러한 논의와 협의의 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이른바 '오테이유 서클'(Cercle d'Auteuil, Société de Mme Helvétius, Salon de Mme Helvétius)이다[4]. 이 서클은 1772년부터 엘베티우스(Anne-Catherine de Ligniville Helvétius, 1722-1800) 부인이 당대 최고 지식인들을 초대하여 주최한 유명한 사교 모임이다[5]. 이 서클에서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학제적인 차원에서 논의하였고 그 결과물을 국민과 정부에 제안하였다[6]. 이 서클에 참여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과 정치인은 Table 1과 같다.
이 서클의 논의를 주도한 카바니스는 의료의 사회적 기능과 의사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였고 이를 의학적 인간학(Science de l'homme)이라는 이념으로 표방하였다[7]. 그에 따르면 건강과 질병은 과학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괄하는 광의의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에, 생물학적 치료와 함께 사회적 치료가 병행되어야만 국민 모두의 건강이 유지될 수 있다. 이러한 건강과 질병 개념에 입각하여 본다면 의사의 의료행위는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여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사회적 행위까지 포함하게 된다. 이제 의사의 역할은 단순히 환자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것으로 한정될 수 없다. 의사는 국가의 보건위생을 전문적으로 담당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에 필수적인 사회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8]는 것이다.
카바니스는 의사가 의료의 사회적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대신하여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아야 하고 또한 이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의사의 공권력이 정당하게 행사되었는지의 여부는 의사 스스로가 자신의 의학적 전문성과 의사직업윤리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고 국가는 이러한 의료자율규제 권한을 전문적인 의사기구에 위임해야 한다[9]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카바니스는 의료의 본질적인 특징이 공공성이라는 전제에서 의사가 전문성과 자율성을 존중받기 위한 조건을 규정하였다. 이 조건이 바로 의사기구가 국민과 정부로부터 위임받은 자율규제 권한이다[10].
오테이유 서클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며 미국 독립선언문(1776)과 미국 헌법(1787)의 입안자인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과 제3대 미국 대통령(1801-1809)인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도 참석하였다. 프랭클린은 1761년부터 유럽을 방문하면서 이 서클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초대 주프랑스 미국 공사로 재직하던 시절(1776-1783)에는 정기적으로 참석하여 유럽과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문제에 대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13].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주프랑스 미국 공사(1785-1789)로 부임한 제퍼슨은 이 서클에서 논의되었던 영국 경험론 철학자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자연권 사상을 비롯해서 계몽사상과 공화주의로 대표되는 프랑스 국가철학으로부터 상당한 영감을 받았다[14].
그런데 프랭클린과 제퍼슨은 이 서클에서 논의된 사상을 단순히 수용하는데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 국가철학이 추구할 가치에 대해서도 국제 정치와 미국 정치의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였고 그 결과물인 프랑스 인권 선언과 프랑스 국가철학의 정신을 미국에 도입하고 현지화하였던 것이다[1516]. 프랑스 파리(1889)와 미국 뉴욕(1886)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프랑스와 미국의 국가철학은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었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의 의사들은 각각 양국의 국민과 정부가 추구하는 국가철학을 자신들의 의사전문직업성에 충실히 반영함으로써 그들이 속한 사회로부터 전문성과 독립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요컨대 계몽주의 시대 독일관념론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유명한 주장(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17]에 빗대어 말하자면, '국가철학이 반영되지 않은 의사전문직업성은 맹목적이고, 반대로 의사전문직업성이 반영되지 않은 국가철학은 공허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수립하고 준수하려는 의사전문직업성은 과연 어떠한 국가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가? 우리 국가철학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선도하는 여러 전문직의 전문성과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잘 반영하고 있고, 따라서 국가철학과 각 전문직 직업윤리가 대립하는 상황이 사전에 방지되고 있는가? 프랑스에서는 과거 수많은 진통을 겪으면서도 의사 전문직의 이념과 가치를 점진적으로 국가철학에 반영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로 프랑스에서는 오늘날 국가철학과 의사 전문직 직업윤리의 대립이 사전에 예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료계에 대한 국민과 정부의 신뢰도 유지되고 있다. 물론 프랑스 국가철학이나 의사전문직업성은 전통과 이념이 다른 우리나라에 그대로 이식될 수 없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국가철학과 의사전문직업성이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 원칙과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여 온 프랑스의 경험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권과 시민권 선언' 또는 이른바 '프랑스 인권 선언'[1819]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집약하고 프랑스 국가철학의 기본 원리를 담고 있다[20]. 프랑스 헌법의 토대가 된 이 선언은 1798년 제헌국민의회가 결의하고 공표하였으며 1946년 제4공화정과 1958년 제5공화정의 헌법 서문에 다시 포함된 이후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21]. 이 선언의 수립과 채택 과정에서 라파이에트 후작(Marquis de La Fayette, 1757-1834) [22]과 더불어 특히 제퍼슨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미국 독립운동은 이 선언의 이념에 의하여 인도되었다.
프랑스 인권 선언은 자연권 사상을 계승하고 정초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자연권은 한 국가의 법체계에서 모든 국민에게 인정하는 법적 권리와 구분된다. 자연권은 특정한 국가나 사회의 법, 관습, 믿음과 무관하게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모든 인간이 갖는 보편적이고 박탈 불가능하며 고유한 권리를 의미한다[23]. 자연권은 오늘날 의료계에서 환자의 권리뿐만 아니라 의사의 전문적인 자율성을 규정할 때도 근거가 되는 이념이고 프랑스 인권 선언의 제1조와 제3조에 강조되어 있다[24].
제1조: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갈 권리를 갖는다.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공이익을 위해서만 가능하다(Article premier. Les hommes naissent et demeurent libres et égaux en droits. Les distinctions sociales ne peuvent être fondées que sur l'utilité commune.).
제3조: 모든 주권은 근본적으로 국가에 근거하여 있다. 어떠한 단체나 개인도 명백하게 국가로부터 유래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Article 3. Le principe de toute souveraineté réside essentiellement dans la Nation. Nul corps, nul individu ne peut exercer d'autorité qui n'en émane expressément.).
이 두 조항에 따르면 모든 환자는 어떠한 의사나 의료기관으로부터도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되고 예컨대 지난해 우리나라 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에서와 같이 감염병이 창궐하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공공이익을 위하여 시민권과 환자의 권리가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권력은 일차적으로 국가만이 행사할 수 있으므로, 환자를 대상으로 전문성과 소신에 따라서 진료할 수 있는 권리인 의사 개인의 임상적 자율성은 특정한 의사단체나 기구가 임의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의료자율규제의 권한을 위임 받아서만 합법적으로 행사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인권 선언 제4조와 제5조는 자유와 이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법을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들은 프랑스 국가철학이 허용하는 합법적인 자유의 범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조항들에 따르면 의사는 국민이나 다른 환자의 자유를 제약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자신의 환자에게 해롭지 않은 모든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율성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전문적인 임상적 자율성은 오직 법에 의해서만 제약될 수 있고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의료 행위조차도 의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전제에서 시행될 수 있다. 하지만 의사에게 주어진 임상적 자율성은 무제한적이고 무책임한 자유가 아니다. 모든 국민이 누리는 자유와 마찬가지로 의사가 향유하는 자유는 법적으로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자유이고 이러한 자유에는 그것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제4조: 자유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각자의 자연권 행사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이 동일한 권리를 향유하는 것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아니한다. 이 제약은 법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Article 4. La liberté consiste à pouvoir faire tout ce qui ne nuit pas à autrui: ainsi, l'exercice des droits naturels de chaque homme n'a de bornes que celles qui assurent aux autres membres de la société la jouissance de ces mêmes droits. Ces bornes ne peuvent être déterminées que par la loi.).
제5조: 법은 사회에 유해한 행위가 아니라면 어떠한 행위도 금지할 권리를 갖지 아니한다. 법에 의하여 금지되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침해될 수 없으며 법이 명하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도 강제될 수 없다(Article 5. La loi n'a le droit de défendre que les actions nuisibles à la société. Tout ce qui n'est pas défendu par la loi ne peut être empêché, et nul ne peut être contraint à faire ce qu'elle n'ordonne pas.).
프랑스 인권 선언 제12조는 불법적인 자유를 제재하고 합법적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공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예컨대 의사단체나 기구가 의사의 자율규제를 실제적으로 관장하기 위해서는 직업윤리를 준수하지 않은 의사를 합법적으로 제재할 공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단체나 기구는 국민과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공권력을 의사 직종의 특수한 이익만을 위하여 결코 사용할 수 없고 오직 국민과 국가의 보편적인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다.
제12조: 인권과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공권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권력은 모든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고 이 권력을 위임받은 자의 특수한 이익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 아니다(Article 12. La garantie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nécessite une force publique; cette force est donc instituée pour l'avantage de tous, et non pour l'utilité particuliére de ceux à qui elle est confiée.).
이렇게 의사단체나 기구는 의학적 전문성을 갖고 국가를 대신하여 공공이익을 실현하기 때문에 그 재원은 당연히 정부가 제공하여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공권력의 행사와 유지를 위하여 모든 국민이 자신의 경제적인 능력에 비례하여 부담하는 일반 조세에 관한 프랑스 인권 선언 제13조에서 그 법적인 근거를 도출할 수 있다. 이렇게 국가 재원으로 유지되는 의사단체나 기구는 프랑스 인권 선언 제14조에 따라서 당연히 사용 용도와 한도의 결정에 국민이 참여하여야 하고 정기적으로 국민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또한 국민은 프랑스 인권 선언 제14조에 근거하여 국가 재원이 투입된 의사단체나 기구로부터 자율규제 활동과 이를 위한 지출에 대하여 보고받을 권리를 가지며, 반대로 의사단체나 기구는 보고의 의무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국민의 참여와 감시는 프랑스 인권 선언 제 17조에 따라서 의사단체나 기구의 합법적이고 책임 있는 자율규제 활동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 일단 국민과 국가가 공공이익을 위하여 공권력을 위임한 이상 의사단체나 기구의 독립성은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의사단체나 기구가 의사 직종만의 특수한 이익을 위하여 공권력과 재원을 사용한다면 더 이상 이 단체나 기구의 자율권은 인정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 인권 선언의 기본 정신을 계승하여 수립된 것이 프랑스 의사직업윤리법이고, 국민과 정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서 이 법을 제정 및 개정하고 의사를 대상으로 공권력을 행사하는 의사기구가 바로 프랑스 의사회(Ordre des médecins) [25]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프랑스 인권 선언과 더불어 자유, 평등, 박애로 대표되는 프랑스 국가철학에는 어떠한 의료이념이 포함되어 있는가? 반대로 프랑스 의사회와 같은 의사기구는 프랑스 국가철학의 어떠한 가치를 의사전문직업성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국민과 정부로부터 자율규제 권한을 위임받을 수 있었는가?
이러한 권한의 위임은 히포크라테스 이래로 의료의 근본 이념인 평등과 박애를 프랑스 의사회가 의사직업윤리법에 충실히 반영하고 실천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가 확인된다. 의사는 환자의 생물학적 또는 사회적 차이를 다양성으로 인식하여야 하고 결코 차별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의료의 근본 이념은 의사가 평등이라는 프랑스 국가철학의 핵심 가치를 가장 잘 실현하는 직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카바니스는 이미 두 세기 전에 주장하였다[26]. 그에 따르면 의료는 필연적으로 평등주의 이념을 추구하기 때문에, 의료는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차별 없이 반드시 제공하여야 할 공공재로 규정되어야 하고[27] 모든 국민은 자신의 사회적 및 경제적 조건과 무관하게 동일한 건강권과 진료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28].
박애는 프랑스 국가철학을 최초로 수립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장 많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치이지만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장 프랑스적인 국가이념으로 평가받는 가치이기도 하다[29]. 박애는 실제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면서 동시에 이를 실현하기 위한 보완 조건이라고 간주된다. 특히 국민의 선천적인 불평등을 경감시키고 국민 모두가 기회의 평등을 누림으로써 최대한의 자유를 향유하려면 분배와 재분배가 필수적인데, 이를 정당화하는 가치가 바로 박애라는 것이다.
물론 박애라는 국가적 가치에 대한 법적이거나 철학적인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박애는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이 대립할 때 공적 이익이 우선한다는 원칙과 법 또는 계약이 도덕적 의무와 대립할 때 도덕적 의무가 더 중요하다는 원칙을 함축한다고 이해되고 있다[30]. 예컨대 이 가치는 의사 개인의 자유나 의사 직종의 이익이 사회의 공적 이익과 대립할 때, 공적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다.
물론 의사는 아무런 보상 없이 평등과 박애의 의무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의사의 사회적 역할과 의무는 프랑스 국가철학의 최고 가치이며 행복의 척도로 간주되는 합법적인 자유를 보장받는 대가이다. 공공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의사는 전문성을 인정받고 자유롭게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는다. 또한 이러한 의료행위를 통하여 창출된 의사 개인의 경제적 이익에 대해서도 합리적으로 요구된 세금 이외에는 모두 의사 개인에게 귀속될 권리도 보장받는다. 전문직의 기본 정의에 포함되어 있듯이 의사라는 전문직은 상대적으로 다른 직종에 비하여 많은 자유를 누린다. 하지만 우리 의료계가 국민과 국가로부터 이러한 자유를 보장받고 누리고 있는지, 또는 반대로 우리 의료계가 국민과 국가에 이러한 자유를 주장할 수 있을 만큼 평등과 박애라는 의료의 근본 이념을 실현하고 있는지는 논의의 대상이다.
프랑스에서는 지난 두 세기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의사직업윤리법으로 법제화된 의사전문직업성에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국가철학의 핵심 가치를 반영해 오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 의사직업윤리법은 사실상 국가철학이 명문화된 프랑스 헌법의 하위법이기 때문에 의사직업윤리법과 국가철학 사이에 법적이거나 철학적인 대립과 모순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프랑스의 상황은 우리 의료 현실, 즉 의사가 전문성과 직업윤리에 근거하여 판단한 최선의 진료가 종종 합법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프랑스 의사는 우리나라 의사와는 달리 자신의 의사직업윤리와 합법적인 적정 진료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에 대해서도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현재의 프랑스 의료환경은 의사 개인과 의사단체 또는 기구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국가철학의 수립에 참여함으로써 국가철학에 프랑스 고유의 의료이념과 의사의 역할을 반영하고자 꾸준히 노력한 결과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프랑스 국가철학이 명문화된 헌법과 프랑스 의사전문직업성이 법제화된 의사직업윤리법이 상호작용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의사 개인과 의사단체 또는 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이다. 프랑스 의사직업윤리법은 헌법의 일방적인 반영이나 헌법으로부터의 연역적 귀결이 아니며 더욱이 비의료인이 전문성 없이 제정한 법도 아니다. 의사 스스로가 국민 및 정부와 협의하여 제정한 법이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단순한 법의 준수가 곧 의사의 자율규제와 동의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역사적인 경험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의사단체나 기구가 국가로부터 자율규제 권한을 위임받기 위해서는 평등과 박애의 가치를 법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추구하여야 할 의무를 부담하여야 한다. 또한 의사단체나 기구가 자율규제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박애를 통하여 평등을 실현하고 있음을 국민과 국가에 지속적으로 보고하고 입증하여야 할 책임도 지어야 한다. 요컨대 의사가 국가로부터 자율규제의 전제가 되는 전문성과 자율성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이에 상응하는 의무와 책임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한 국가의 국가철학이 추구하는 가치를 의사전문직업성에 충실히 반영하고 의사가 이 가치를 실현하고 있음을 모든 국민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의사전문직업성은 우리나라 국가철학을 충실히 반영하고 그 가치를 실제적으로 실현하고 있는가? 그 이전에 우리 의사전문직업성이 반영하여야 할 국가철학은 무엇인가? 과연 우리 국민 모두가 협의하고 합의한 국가철학이 존재하는가? 한 나라의 국가철학이 수립되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국민의 다양한 의견뿐만 아니라 여러 전문직의 이념과 가치가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의사는 우리 의료 현실을 고려한 참된 의료이념을 먼저 수립하고 이 이념이 추구하는 가치를 국민과 국가에 알려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의료이념을 우리 국가철학에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 의료계는 실추된 국민과 국가의 신뢰를 회복하고 의료자율규제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말에 유럽에서 처음 등장한 의사윤리강령은 상류 귀족 집단에 속한 신사로서 의사가 지켜야 할 예절과 이를 어겼을 때 부가되는 징벌을 나열한 규범집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이후 자유, 평등, 박애가 프랑스의 국가철학으로 자리 잡고, 의사와 환자의 관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의사윤리와 이에 따른 자율규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1847년 미국 AMA 창립총회에서 채택된 최초의 윤리강령(AMA Code of Ethics)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때까지 미국 의사사회가 따르던 Thomas Percival의 영국식 의학윤리가 대부분 폐기되고, 의사와 환자, 그리고 사회는 모두 평등하게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의학윤리는 이 3자 간의 계약에 따른 상호 권리와 의무의 규정으로 정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에서의 의사의 지위가 이러한 계약을 얼마나 잘 준수하는가, 즉 의사 사회가 얼마나 자기 관리, 자율규제를 충실히 이행해 나가는가에 달려있다는 이해와 합의가 포함되어 있다. 본 논문은 현대 의사윤리강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국가철학의 설립과 그 철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의사사회의 자율규제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철학이 부재한 현대 한국사회, 윤리강령을 귀찮고 불편한 간섭 내지 구속으로 치부하는 우리 의사사회에서 본 논문은 의사의 의무와 권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여야 할지를 가르쳐 줄 것으로 본다.
[정리: 편집위원회]
Acknowledgement
This study was supported by the Research Institute for Healthcare Policy, Korean Medical Association in 2015 (2015-3).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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