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Born in 1911 to a wealthy Christian family in Korea, Ki-rye Jang graduated from Kyungsung Medical School and married Bong-sook Kim in 1932. Serving as an assistant of surgery under Dr. In-je Paik from 1932-1938, Dr. Jang also worked as a lecturer in surgery. In 1940 he obtained his Ph.D. from Nagoya University, Japan.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Dr. Jang was appointed as the General Director of Pyongyang District Hospital in 1946 and as a professor at Kim Il-sung Medical School in 1947, and became the first Ph.D. awardee in North Korea in 1948. In December 1950, during the Korean War, Dr. Jang fled with his second son, Ka-yong, and arrived in Busan. In 1951, he established Gospel Hospital. In 1958, Dr. Jang founded the Busan Local Surgical Association, and in 1959, he successfully performed the first liver lobectomy in Korea and received the Academic Award (presidential award) from the Korea Academy of Medical Sciences. In 1968 he founded Gospel Professional Nursing School and the Busan Blue Cross Insurance Union and was elected as the first head of the union. In 1974, he founded the Korea Liver Research Association and was inaugurated as the first president. In 1976, he was awarded the Order of National Service Merit - Dongbaekjang, and in 1987 the Ramon Magsaysay Award for Public Service. On December 25, 1995, at the age of 84, he passed away. Throughout his life, he missed his wife and children from whom he was separated due to the division of Korea. Beyond his suffering due to the division of Korea, Dr. Jang was a practitioner of love and compassion. Love of Christianity, compassion for the poor, living together in solidarity, excellence in creativity, commitment to peace and non-violence, generosity and non-possession, and freedom in truth were the key concepts that ran throughout Dr. Jang's life.
1938년 춘원 이광수의 주치의였던 장기려 선생은 춘원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이며 춘원과의 대화 중에 "당신은 천재요, 아니면 바보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알려진다. 1943년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절제술을 성공하고 1959년 간암 환자의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한 장기려 선생은 실로 뛰어난 외과의사였으며, 또한 평생을 무소유로 자기의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은' 바보였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장기려 선생은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백인제 박사에게 외과의로 수련을 받으며 경의전 외과 조수와 강사로 재직했다. 1940년에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로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평양 연합기독(기흘)병원에 근무했다. 해방 후 평양도립병원장과 평양의과대학(김일성대학) 외과교수로 재직하며 1948년에는 북한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장기려 선생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둘째 아들 가용(張家鏞·전 서울대 해부학과 교수)만을 데리고 월남하였다. 북한에서 탁월한 외과교수였던 그는 남한에서 서울의대 교수(1953-56년), 부산의대 교수 및 의대학장(1956-61년), 서울 가톨릭의대 교수(1965-72년), 복음간호대학장(1968-79년) 등 대학에서 20년을, 복음병원장(1951-76년), 청십자병원장(1975-83년), 부산아동병원장(1976년), 부산백병원 명예원장(1983년) 등 병원장으로 40년
을 일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장기려 선생은 의학도가 되려고 지원할 때에 '치료비가 없어 의사의 진찰을 받지 못하는 환자를 위하여 의사일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생각하여 평생을 바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세월이 갈수록 이 결심을 더욱 깊이 실천하여, 81세에 일과성 뇌혈관순환부전으로 쓰러지어 오른쪽 마비가 된 상태로 환자들 돌보기까지 한평생 동안 실천하였다.
장기려 선생의 생애는 청소년기를 거쳐 결혼 후 아이들을 낳고 저명한 외과의사로 활약하던 이북 지역에서의 삶과 한국전쟁으로 부모와 아내, 다섯 자녀들과 생이별을 한 뒤 분단의 고통을 안고 지낸 남한에서의 45년 생애로 나눌 수 있다. 둘째 아들 가용과 함께 남하하여 1950년 12월 도착한 부산은 전쟁의 상흔과 굶주림, 질병으로 피폐해진 피난민들이 차고 넘치는 곳이었다. 다음해 6월 장기려 선생은 부산에 천막을 치고 복음병원을 세워 피난민과 가난한 사람을 무료진료하는 삶을 시작하였다. 동족상잔과 이산가족의 고통을 온몸으로 안고 그 고통을 넘어선 사랑과 인술을 처음으로 펼친 곳 부산에 대한 장기려 선생의 사랑은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선생의 몸을 화장하여 부산 앞바다에 뿌려달라고 유언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개인의 이익과 영달 추구에는 영 바보였던 장기려 선생은 이웃사랑에는 탁월하고 창의적이었으며 창의성을 실천적 사업으로 옮겨 결행하는 분이었다. 1968년 국가도 감히 엄두를 못내는 의료협동조합운동을 벌여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1985년 말에는 23만 명의 회원을 가지는 큰 조합으로 발전시켰다. 가난한 많은 부산시민들을 질병과 절망에서 구한 이 운동은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 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뜻으로 시작된 최초의 의료보험기구로서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9년 간질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 창설에 앞장서고 1974년 한국간연구회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부산의 사람들은 '병원에 간다'고 하지 않고 '장 박사에게 간다'고 했다. 장기려 선생이 환자들이 좋아하고 꼭 필요한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남을 동일화해서 보는 습성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요셉이나 다윗 같은 성서 속의 인물이나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하여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지만, 환자와 자신을 동일화하게 된 계기는 1957년 장기려 선생이 스물두 살의 청년을 만난 것이었다. 위궤양으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는 딱한 청년을 보는 순간 북에 있는 장남 택용이 생각났다. 키도 외모도 아들 택용과 비슷한 그 청년을 무료로 수술해 준 경험은 선생의 의사 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일이 있은 지 20년이 지난 1979년 선생은 그 일을 회고하며 말한다. "그 후부터 나는 환자를 진료하면서 '내가 환자 자신이라면…'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아졌다. …특히 수술을 권할 때에는… 환자가 곧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이 올바른 판단이 내려지게 되는 것을 종종 경험하고 있다."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의 젊은 환자에서 북에 두고 온 아들을 본 장기려 선생. 그가 안고 있는 이산가족의 아픔과 분단의 고통을 통해 환자를 자신의 가족과 그리고 자신과 동일화하게 된 그는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를 실천하는 좋은 의사가 된 것이었다.
한국전쟁 때 헤어진 부인을 사랑하여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실천한 장기려 선생의 삶의 중심에는 기독교 신앙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재혼을 권했지만, 장기려 박사는 영원한 사랑을 믿었다.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다. 만일 우리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뿐 아니라 떠나 있을 때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 분단의 아픔을 평생 짊어지고 가난한 삶을 살았던 그였지만 온전한 사랑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다. "나의 세계는 나의 사랑하는 곳에 있다. 그것은 나의 영원한 왕국이다.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1940년부터 함석헌, 김교신 등과 교제한 장기려 선생은 개신교 교회의 장로였지만 기독교 이상주의를 중요시하여 물신주의와 자본주의에 영향을 받는 기독교계의 변화를 우려하였고 32년간 무교회주의 성격의 '부산모임' 집회를 주관했으며 국제 교회개혁 모임인 '종들의 모임'에 참여하였다. 집 한 채 없이 병원에 딸린 사택에 거주하며 선생은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가난한 환자들을 보살폈다. 그의 묘비에는 선생의 뜻에 따라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