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medical doctor is a profession far from the political activities. However, there is an old saying that a great doctor cures a country while a small doctor cures a patient. This saying reveals that doctor's curing activities were not strictly limited to curing a patient's physical diseases. In fact, it is not difficult to find doctors who dedicated themselves for curing diseased countries. Sun Yat-sen, the first president and founding father of the Republic of China, was the exemplary figure of the great doctor who cured the nation. When Japanese colonized Korea, many doctors dedicated themselves to liberation activities. Some of them moved to Manchuria, China and even Mongol to continue their struggle against Japanese rule. Medical students were at the front line of the March first movement in 1919 which was a nationwide protest movement against Japanese unjustified occupation of Korea. During the Korean war, a doctor called Hyun Bong Hak saved the lives of more than 100,000 refugees by transporting them from Hungnam harbor to Koje island. And Chang Ki Ryeo opened a free clinic in Busan to take care of the refugees gathered there. The lives of those great doctors of yesterday invite us to reflect our lives as a doctor today.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이다. 한편에서는 광복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나라를 되찾기 위해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끈질긴 투쟁을 벌였던 많은 선조들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관점이다. 물론 이차대전의 종전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의 과정 속에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우리 민족의 끈질기고 자발적인 노력이 없었더라면 광복이 이루어지기도, 또 유지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을 우리는 독립투사라 부른다. 그런데 애초부터 그런 종류의 사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생업을 유지하던 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닥쳐온 국권상실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받아들일 수 없어 일어나 항거했던 것이다. 남녀노소, 직업과 신분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독립투사가 되었다. 이들 독립투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의사들이 있었다.
흔히 의사는 정치적인 활동과는 관계가 먼 직업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큰 의사는 나라의 병을 고친다'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의사의 치유행위는 단순히 개인의 몸에 국한되지 않았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의사들의 모습을 주변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처럼 19세기 말부터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으로 고통 받은 중국의 경우, 중화민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 손문은 의학을 공부한 의학도였다. 또 문학가로서 중국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한 노신 역시 일본 센다이 의전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의학도였으나, 소수의 환자가 아니라 나라를 구하는 의사가 되기 위해 문학의 길을 택했다.
중국의 손문이나 노신이 의학도였던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에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헌신했던 의사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쉽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식민지 조선에서 지배권력의 정당성에 대해 눈만 감는다면, 그리고 식민지배를 일상으로 받아들인다면 의사는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업이었다. 그런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타국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다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의사들이 있었다. 또 한국전쟁의 와중에 수많은 동포를 사지에서 구해낸 의사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합병되었다. 물론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과 더불어 실질적인 주권을 잃은 대한제국이 조만간 일본의 식민지가 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사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 역사에서 가장 큰 위기였던 원의 간섭기에도 나라의 명맥이 끊어지지는 않았던 사실에 비추어볼 때,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민족사의 단절이 시작된 한일합방은 큰 충격이었다. 이어서 총독으로 군인이 임명되고, 군인에 의한 무단통치가 시작되었다. 무단통치의 시기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독립운동의 기미만 보이면 체포되었으므로, 독립운동에 뜻을 둔 인사들은 불가피하게 해외로 나가 활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독립운동에 투신한 의사들로는 세브란스 초기 졸업생들이 눈에 띤다.
1878년 6월 25일 황해도 장연군에서 출생한 김필순은 1908년에 배출된 세브란스 1회 졸업생 7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재학 중에 스승 에비슨을 도와 '약물학'을 비롯 한 여러 국문의학교과서의 편찬과 번역에 참여한 바 있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 세브란스에서 의욕적으로 진행된 국문의학교과서의 편찬은 의학사전의 편찬을 비롯하여 의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 사업으로 한국의 현대의학 토착화에 큰 의미를 지니는 사업이었다. 일찍부터 에비슨과 함께 일해 온 김필순은 바로 이 사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1]. 그는 졸업 후 학교에 남아 후배들을 가르치는 한편 병원 운영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에비슨은 자신의 뒤를 이어 학교와 병원을 맡길 인물로 그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망국의 백성이 된 김필순은 단순히 학교와 병원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이 일어났다. 주로 반일적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사건에 김필순은 핵심적 인물로 지목을 받아 경찰의 체포대상이 되었다. 자신에 대한 체포 정보를 미리 입수한 김필순은 한 장의 편지만을 남기고 서간도 통화현으로 건너갔다. 당시 통화에는 신민회 이회영이 조선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있었고,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통화에 자리 잡 은 김필순은 병원을 열고, 병원의 수입은 모두 조선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하였다. 그러나 통화도 안전한 지역이 되지 못하자 1916년 더욱 내륙인 치치하얼로 도피하였다. 이곳에서도 그는 병원을 열고, 땅을 구입하여 평소 생각하고 있던 이상촌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맨몸으로 고국을 떠나온 동포 30가구를 받아들여 농장을 운영하는 한편 중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청년들을 모아 그곳을 독립군 양성의 기지로 만들 계획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갑자기 나타난 일본인 의사로부터 우유와 약을 먹은 이후 독살로 의심되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한편 김필순과 같이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인 주현측은 졸업 후 고향인 선천으로 가서 개원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 역시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약 2년간의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1913년 석방된 이후에도 항일활동을 지속하다가 1919년 삼일운동 이후 만주의 단동으로 건너갔다. 단동에서 그는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또한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부 참사를 맡았는데, 이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역할이었다. 이후 그는 상해를 중심으로 적십자회, 국민 대표회의 등의 단체에서 활동했고, 다시 산동으로 옮겨 흥사단 활동과 이 지역의 의료선교활동에도 참여했다. 1925년 귀국하여 고향 선천에서 동제의원(同濟醫院)을 개원하는 한편 흥사단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수양동우회 활동도 지속했다. 그밖에도 그는 선천에서 종교, 교육, 사회사업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런 가운데 1937년에 일어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4년 5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석방 이듬해인 1941년 미국 선교사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낸 사실이 드러나 다시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1942년 3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2].
김필순, 주현측 외에도 박서양, 신창희 등 다른 졸업생들도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7명의 졸업생 가운데 4명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몽골 국왕의 주치의로 활동하며 몽골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세브란스 2회 졸업생 이태준의 활동도 인상적이다. 1920년 레닌 정부가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자금 40만 루블을 모스크바에서 북경까지 운반하는 책임을 맡은 이가 바로 이태준이었다. 이 임무를 완수한 그는 북경에서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당시 의열단이 절실히 필요로 하던 폭탄제조기술자를 데리러 고륜으로 갔다가 러시아 백위파군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3]. 이태준은 국내에서는 선배인 김필순과 연락이 있었고, 국외에서는 세브란스 후배로 장가구에 십전의원(十全醫院)을 개원한 김현국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장가구와 고륜을 오가는 독립투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밖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개원을 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세브란스 3회 졸업생인 곽병규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4]. 이들 초기 세브란스 졸업생들은 일제 강점 초기인 1910년대에 조국을 떠나 만주와 중국, 몽골, 연해주 등 각지에 흩어져 활동했다. 이들은 현지에서 병원을 열어 지역민과 동포들을 진료하는 한편, 병원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하여 독립군자금을 조성하고, 오고가는 애국지사들을 여러 가지로 도와주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김필순과 이태준처럼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삼일운동은 온 민족이 거국적으로 참여한 항일독립운동이었다. 시위의 형태로 이루어진 삼일운동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으나, 그 가운데서도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특히 당시 국내에서 가장 고등교육을 받고 있던 전문학교 학생들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에는 전문학교 가운데 의학전문학교로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경성의학전문학교 의 두 개 학교만이 있었으며, 이 두 학교의 학생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 두 학교 학생들의 정확한 참석 규모는 알기 어렵지만 당시의 분위기상 대부분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검거되어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삼일운동으로 검거되어 옥살이를 한 학생들이 경성의전은 30명이었고, 세브란스 의전은 10명이었다[5].
검거된 경성의전 학생들이 많았던 것은 조선인 학생 수가 많았던 이유도 있었겠으나 조선인은 일본인에 비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발언을 수업 중에 해온 해부학 교수 구보 다케시의 망언 사건[6]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경성의전의 조선인 학생들은 학교에서 겪는 일상적인 차별로 인해 평소에도 반일감정이 컸고, 그것이 삼일운동에서 보다 적극적인 시위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삼일운동 이후 경성의전 학교 당국은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학생들에 대한 가차 없는 징계를 단행하여 80명에 가까운 조선인 학생을 퇴학시켰다. 이렇게 퇴학당한 학생들의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공부를 계속하기도 하고, 유상규와 같이 학업을 중단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경우도 있었다[7].
당시 의료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삼일운동은 의사보다는 의학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학생운동의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의사들이나 의료계에서 수수방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기팔의 경우와 같이 지방에서 개원하고 있던 의사가 그 지역의 시위를 주도한 경우도 있었다[8].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삼일운동 당시 외국인 선교의사들의 활동이다. 세브란스 의전의 세균학 교수로 있던 스코필드는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릴 정도로 삼일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는 도쿄에서 열린 선교사대회에 참석하여 일제의 제암리 학살 만행사건을 폭로하였다. 또 삼일운동 중에는 전국의 시위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이를 널리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그는 삼일운동 이후에는 삼일운동 당시의 목격담을 담은 책을 발간할 계획을 진행 중에 암살 미수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또 유관순을 비롯하여 삼일운동으로 투옥당한 독립운동가들을 방문하고, 총독부나 일본의 고관들을 만나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을 규탄하고 항의하기도 했다[9]. 그의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그는 총독부 당국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고, 유형무형의 압력을 받은 끝에 결국 1920년 한국을 떠났다. 한국을 떠난 이후에도 그는 일제의 부당한 식민 지배와 그에 항거하여 일어난 삼일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알리는 일을 계속하였다.
또한 스코필드와 같이 세브란스 의전에서 산부인과 교수로 재직하던 허스트도 삼일운동에 기여하였다. 당시 세브란스 의전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교내에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경이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위해 학교를 에워쌌다. 다급하게 된 학생들은 등사기와 독립선언서를 해부학실습대에 감추고 그 위에 해부용 시체를 올려놓았다. 경찰이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허스트는 "이곳은 교육기관일뿐더러 우리 학교에서는 그런 인쇄를 하는 학생이 없다"며 두 팔을 펴고 강력히 저지한 덕분에 무사히 위기를 넘기고 세브란스병원에 있던 독립선언서가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10].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35년간의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난 감격적인 날이었다. 그러나 광복에 뒤이어 일어난 남북 분단은 5년 후 한국전쟁의 비극을 낳았다. 한국전쟁 중 많은 의사들이 군의관으로서 전장에서 다친 병사들을 치료하거나, 또는 피난지에서 전화로 인해 몸과 마음이 상한 동포들을 치료해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사람을 꼽는다면 한국의 쉰들러라 불리는 의사 현봉학과 피난지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열었던 장기려이다.
1944년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현봉학은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모교에서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을 당하게 되었다.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현봉학은 미 10군단 알몬드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에 임명되어 북진하는 미군과 함께 자신의 고향이자 당시 미 10군단의 본부가 있던 함흥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통일을 목전에 둔 순간 갑자기 대규모 중공군의 참전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태를 맞은 미 10군단은 철수를 결정했다. 어렵게 고향에 돌아온 현봉학은 고향의 친지들을 적 치하에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며칠 밤의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알몬드 사령관을 찾아간 현봉학은 민간인 철수도 함께 고려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10만에 이르는 미 10군단 병력의 철수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힘든 작전인데 민간인 철수까지 고려할 여유는 없다는 부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이러한 거절에도 현봉학은 포기하지 않고 몇 차례나 알몬드 사령관을 더 찾아가 간곡히 부탁하고 설득하여 마침내 민간인 철수의 허락을 얻어내었다. 미군과 함께 남으로 피난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10만여 명에 이르 는 함흥과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순식간에 흥남부두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타고 갈 배를 마련하기 위해 부산과 일본에 긴급전보를 타전한 끝에 피난민들을 실을 배들이 도착했고, 10만 명의 피난민은 이 배들을 타고 무사히 사지를 탈출할 수 있었다[11]. 동포를 살리겠다는 현봉학의 간절한 바람이 10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기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1932년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한 장기려는 평양연합 기독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그는 평양에서 일했던 관계로 북한 정권수립 후 김일성 의과대학의 교수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12월 남한으로 떠났다. 부산에 정착한 그는 제3육군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러는 가운데 장기려는 한상동 목사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전 영창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미국에서 얻은 후원금으로 피난민들을 도울 계획을 세우던 중이었다. 이들은 이 후원금으로 병원을 세우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장기려와 함께 1951년 7월 1일 피난민을 위한 무료 구호병원 복음병원을 열게 되었다. 피난민을 위한 복음병원의 진료 활동이 알려지자 이후 6년 간 국제연합민사원조사령부에 약품을 원조받아 무료진료를 계속할 수 있었다. 경성의전의 후배 전종휘도 힘을 보탰다. 처음에는 영도의 한 구석에 천막을 치고 환자를 보기 시작했으나 전쟁 후인 1956년 미국군사원조단과 미국개혁선교회 원조금으로 부산 송도에 새로운 병원을 신축하였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맨몸으로 탈출하여 부산에서 어렵게 생명을 이어가던 피난민들이 병까지 걸리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 몰리게 된다. 그러한 그들에게 무료로 진료해주는 장기려의 복음병원은 고달픈 몸과 마음을 함께 치료해주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12].
이상에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신을 던진 의사와 의학도들, 그리고 전쟁의 한 가운데서 10만 명이 넘는 동포를 살리고, 피난지에서 죽어가던 동포를 돌보았던 선배 의사들의 삶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잃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내에서, 그리고 국내의 활동이 여의치 않자 만주와 중국, 몽골 등 먼 이역 땅으로 떠나 그곳에서 의사로서 활동함과 동시에 독립을 위한 기지를 마련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만 매진하기도 했다. 의학도들은 의학도들대로 삼일운동에 앞장서 이 나라의 독립을 당당히 요구했다.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큰 의사의 삶을 살았던 이들 선배 의사들의 모습은 오늘날 이 땅에서 의사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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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ong JW, Park HW. Life and activities of Chu Hyun Chik. Korean J Med Hist. 2008; 17:87–98.
3. Ban BY. Dr. Yi Tae-jun (1883-1921) and his anti-Japanese activities in Mongolia. Stud Hist Cult. 2005; (special issue):277–302.
4. Ban BY. Severance and independence movement. Yonsei J Med Hist. 1998; 2:3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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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Kim HE. Doctors of empire.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2014.
7. Choi QJ, Hwang SI, Kim SY. A life of Ryu San-Kyu, a colonial modernized intellectual. Korean J Med Hist. 2009; 18:157–171.
8. Park YH, Hong TS, Sihn KH, Lim SM, Kim HG. Medical doctors' independence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Korean J Med Hist. 2008; 17:223–238.
9. Kim ST, Yu J, Lee H, editors. Dr. Frank W. Schofield. Seoul: SNU Press;2012.
10. Yonsei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One hundred of medicine in Korea.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1986.
11. Hyun BH. There is no retirement for me. Seoul: Yeoksabipyoungsa;1996.
12. Kim ES. Chang Ki Ryeo. Seoul: Bomnamoo;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