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세계의학교육연맹(World Federation for Medical Education)은 개별 국가별로 미래지향적인 의사의 역할을 규명(Project on the Future Global Role of the Doctor in Health Care)하여 제정할 것을 천명하였다[1]. 이에 따라 많은 나라들은 자국의 특수한 환경과 특성을 반영한 의사상의 정립을 시도하고 있다.
오늘날 의사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종래에는 의사의 역할을 의사와 환자 사이의 진료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최근에 들어서는 변화하는 의료 환경에 부합하는 새로운 역할을 의사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고자 세계의학교육연맹은 미래지향적인 의사의 역할을 탐구할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문가적인 자문을 구하였다[2]. 세계에서 모인 의학교육전문가 집단은 의사의 역할에 관해 합의된 중요한 요소들을 열거하였으며, 대표적인 합의 사항은 대략 이렇다. 예컨대, 의사의 전문직업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의사는 그가 속한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역할이 있어야 하고 사회적 과업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의사는 동료 의료인과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종신 학습을 받을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자율규제에 참여해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의사는 의료제도에 관해 관심을 갖고 발전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의사의 '사회적 역량'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의사의 역할이 이와 같다면, 앞서 언급하였듯이 오늘날의 의사는 진료관계의 역량뿐만 아니라 보다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사회적 역량을 갖출 것을 요구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의사의 역할에 대한 확장된 개념은 의료 환경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써 의료가 점차 사회적 실천의 성격이 강한 국민의 기본권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3]. 또한 현대 의료가 상업화와 산업화됨에 따라 종래의 의사-환자를 자유계약의 관점에서 보던 진료역량중심의 사고에서 보다 더 포괄적이고 사회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의료의 사회적 실천의 측면이 강조됨에 따라 의료가 정치, 문화 그리고 사회의 의료 외적 영향력이 증대되는 현상은 의료의 본질적인 가치를 수호하고 정치적으로 희생되지 않고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해 의료의 내적 역할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의사의 역할은 단지 진료관계로만 축소하여 볼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의사의 국제적인 역할 또한 중요한 덕목으로 부상하고 있는데, 이것은 환자, 학생, 교육 그리고 병원 기관의 국제적인 이동과 대규모 기업화 현상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사는 제한된 의료자원에 대한 관리능력과 국제적인 의학교육의 질 관리까지 바라볼 수 있는 거시적인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4].
물론 환자-의사간의 진료적인 관계 속에서 의사의 역할은 전통적으로 치료적인 능력을 중시하는 임상적 역량이 주된 관점이고 의사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의 하나임은 분명하다[5].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의사가 전문적으로는 역량이 있으나 사회적으로 역량이 없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제 사회적 제도로서 의료는 의사가 단순한 임상적 능력뿐만이 아닌 비임상적 능력을 갖출 것을 요구 받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곧 의사의 사회적 역량을 의미한다. 의료를 임상적 또는 비임상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인위적이며 임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간략히 언급한 의료 환경의 변화 속에서 임상적 또는 비임상적 역량 모두를 종합할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다. 만일 이와 같은 논의가 옳다면, 그와 같은 종합적인 개념을 세계의학교육연맹이 제시한 "의사의 포괄적 역량(global role of doctor)"라는 용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1].
사회적 역량
사회적 역량이란 용어는 주로 심리학이나 교육학에서 아동과 청소년의 발달과정에서 사용되어온 개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아동이 성장하면서 사회적, 정서적 그리고 인지적 기술과 행동을 통하여 사회에 적응하는 역량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간략한 정의에서 보여주듯이, 그러나 사회적 역량은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환상적 개념처럼 보일 수 있다. 아동은 그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발달하는 양상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동의 사회적 역량으로 거론되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예컨대, 그 요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 또는 자존감, 대인관계 능력, 자기중심적이고도 충동적인 행동에 대한 스스로의 조절, 타인에 대한 이해, 복잡한 사회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포착의 인지 또는 타인의 동기와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등이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역량을 갖고 있는 아동은 사회적 역량이 있다고 여겨진다. 사회적 역량에 관한 학술적인 언급은 앞에서 열거한 대로 주로 아동뿐 만 아니라 중등교육 또는 청소년의 발달에 관해서도 논의되어 왔다. 그 논의는 주로 직업 및 진로결정에 대한 영향, 시민의 역량으로서 봉사와 협동정신, 참여와 권리신장, 공동체 의식 그리고 민주의식을 들고 있으며, 더하여 인간관계 역량, 학습역량 그리고 사회적응 능력 등에 관한 것이다. 특히, 사회적응 능력에서는 정보화 능력, 즉 사회의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는 능력과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는 신기술적응 능력, 조직적응 능력, 변화적응 능력 또는 친 사회적 기술 등을 열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회적 역량은 최근에 들어 의료계에 종사하는 의료 인력을 평가하는 개념으로 도입되고 있다. 의료영역에 사회적 역량 개념을 도입하려는 경향은 앞서 언급한 의료환경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의료환경은 의사에게 다양한 능력과 자질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곧 종래의 의사의 역할이 변화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의사의 진료 역할 외에 다양한 역량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자연스러운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연합(European Union)에서는 2005년 번영과 참살이(well-being)에 관한 벤치마크 핵심지표로 사회적 역량의 측정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하였다[6]. 이 보고서는 아렌트(Arendt, 1958)를 인용하여 사회적 역량을 '한 개인이 이 세상에서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이라고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 제시하고 있는 핵심지표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대인관계로 인간 상호적인 것이다. 두 번째는 문화간 또는 문화 상호적인 것이다. 세 번째는 사회적 또는 시민적 역량이다. 그 중에서 사회적 역량 개념에 관해서는 생애주기를 통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에서 적응하는 능력에 관계된 것으로 규정하였으며, 특히 가족, 학교, 사회 그리고 연령에 따른 적응에 대한 고려가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사회적 역량 개념은 어떠한 맥락에서 적절한 구인(construct)에 대한 정의로 규명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사회적 역량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의 구인이 제시되었다. 예컨대, 대표적인 구인으로 공감, 자기조절, 신뢰, 자기 자신,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참여 등을 들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사회적 역량 개념이 인간 상호간의 작용과 사회적 요구 또는 어떤 상황적 특성에 따라서 여러 가지 개념적 모델이 제시된다고 보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적 역량은 특정 상황 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사회적인 능력이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사회적 역량의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정의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사회적 역량을 일종의 개인적인 성향 또는 특성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는 공감, 수용성, 인내성, 양심적임, 또는 협동능력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특성은 여러 가지 사회적 상황에 상호작용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된 다양한 구인을 의미한다. 여기에 더하여 심리학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효능, 즉 자기 효능감 또는 정서적 지능도 사회적 역량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경제학에서는 사회적 역량을 부드러운 기술 또는 연성 술기(soft skill)로 표현하는데, 여기에서 연성 술기는 유연성, 팀능력 그리고 동료나 고객을 동기화 시킬 수 있는 능력 등을 의미한다. 사회적 역량에 관한 경제학적 정의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사회적 역량을 사회적 자산이나 사회 자본으로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료영역에서 사회적 역량에 관한 논의는 다양하게 다루어졌지만, 프랑스 면허기구가 2005년에 개최한 심포지엄의 결과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심포지엄의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영미문화권에서 만들어낸 역량 개념은 기술적인 영역, 관계적인 영역 그리고 전략적인 영역으로 구별하여 정의되어야 한다[7]. 여기서 기술적인 것은 의사 전문직이 가져야 할 전문직 역량을 지시하고 있으며 다른 두 영역은 넓은 의미의 사회적 역량에 부합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의사가 갖추어야 할 보편적인 역량으로서 흔히 거론되는 문제해결 능력, 갈등해소 능력 또는 리더십 등은 사실상 임상적 영역의 범주를 초월하는 단계로 진료현장 이외에서의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 본격적인 사회적 역량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사회적 역량과 실천의학
우리나라에서 의료에 대한 여러 사안은 매우 첨예한 갈등 상황을 표출하고 있다. 이것은 의료문제가 의료제공자, 의료사용자, 의료제도를 기획하는 집단뿐만 아니라 의료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간접적 이득을 추구하는 집단 등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갈등 상황은 이제 의료가 단순한 의식주의 단계를 넘어선 생존의 기본권으로 인식되고 있는 발전적 증거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와 같은 인식의 전환에 상응할만한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라는 어려운 문제를 낳고 있다[8]. 의료의 가장 보편적인 목적은 공익적이며 타인을 위한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무분별한 정치적 구호에 따른 선심성 무상의료는 자칫 나라의 존망까지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사회적 해악의 위험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자율에 또는 타율에 의한 것이든 조정 기능을 없을 경우 의료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상업성 또는 산업성을 근거로 하여 이익 창출만을 쫓는 거대 의료사업으로 변질되어 의료가 갖는 본성을 상실할 수 있다.
의료에 실천의 개념을 도입할 경우 의료의 재화를 내적 재화와 외적 재화로 구분할 수 있다. 의료의 내적 재화는 수월성(excellence)에 있다[9]. 수월성이란 환자에 대한 최대의 이득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의사의 입장에서는 의사 자신이 펼치는 의료의 최선과 최고의 노력 및 완벽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에 의료의 외적 재화란 돈, 명예, 권위, 권력, 신분, 명성, 인류애적 인상, 존경, 시험통과 그리고 기관 생존 등의 의료가 갖는 부차적인 재화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의료는 매우 전문화되어 있다. 의료행위는 의사에게 있어 곧 생존을 위한 것이며, 의료기관은 사회제도 속에서 기관을 생존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현대사회에서 의료는 외적 가치와 내적 가치가 적절한 평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의사는 정부와 정치가에 의하여 결정되는 의료정책에 대하여 매우 다른 견해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사회적 실천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의사는 자신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정책에 대한 정치적 결정에 대해 반감을 표출하고 있다. 의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의사가 의료의 내적 가치를 수호함으로써 보장되어야 할 외적 가치인 의사 개인과 의료기관의 생존에 대한 환경이 악화되는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다. 반면에 사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의료계가 제기하는 요구가 외적 재화에만 편중되어 있다고 시각을 달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대립적 시각은 과학과 기술의 수월성을 우선으로 하는 현대 한국 사회의 의료의 수월성에 대한 가치와 거시적 시각에서의 보편적 수혜를 중시하는 사회적 시각의 수월성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10]. 과학과 기술적 입장에서 교육받은 의사가 거시적이고 사회적인 시각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량이다. 그러므로 의료가 갖는 내·외적 재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균형감각을 갖기 위해서 의과학 중심 사고와 실천 능력만큼이나 거시적이고 사회적인 시각으로 의료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현대 사회에서 의료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전문직에게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고 요청되고 있다. 예컨대, 전문직은 전통적인 역할에 더하여 개인과 사회와의 의사소통능력, 조직능력, 관리능력, 시간관리 능력, 협동능력, 변화대처능력, 국제적 시각 그리고 전문직업성과 윤리성 등의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2]. 이것은 의료가 개인적 사안이 아닌 공적이고 사회적인 사안으로 변모되었기 때문이다.
의학교육의 변화와 사회적 역량
의학교육이 성과바탕학습에서 역량바탕학습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국제적인 추세다. 이러한 변화는 후자가 전자보다 의학교육 고유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역량바탕학습에 대한 논의는 21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예컨대, 캐나다의 전문의협회(Royal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 of Canada)에서 만든 'CanMEDS 2005'에서는 역량을 7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의료 전문가, 소통자, 협력자, 보건증진자(health advocator), 관리자, 학자 및 프로페셔널로 나누었으며[11], 미국 졸업 후 교육인증위원회(Accreditation Council of Graduate Medical Education)는 1999년에 일반 성과(general competencies)의 6개의 성과 영역을 각각 환자진료, 의학지식, 진료현장 중심의 학습과 역량향상, 의사소통기술, 전문직업성 및 체제에 바탕을 둔 진료로 구분하였다.
비록 의학교육에서 '소통, 협력, 관리, 전문직업성, 성과 체제'와 같은 개념을 사회적 역량으로 표시하고 있지 않지만, 실제로 임상적인 역량 이외의 것을 감안하면 의사전문직에서 비임상적인 것에 대한 역량으로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영국의 왕립내과협회(Royal College of Physician)에서 정의한 '의사의 평생전문성 개발'은 역량을 임상적인 것과 비임상적인 것으로 구별하고 있다[12]. 여기서 비임상적인 역량은 리더십과 팀워크 등에 관한 것이 핵심적인 것이며, 더불어 전공의나 지도 전문의 그리고 교수 등 의사의 교육자로서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한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분과 논의가 옳다면, 오늘날 의사의 사회적 역량은 우리 의료계에서 막연하게 또는 애매모호하게 표현해 왔던 비임상적 역량 또는 포괄적 역량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편 최근 캐나다에서 발표된 한 논문은 사회적 역량을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비추어 의사가 살고 있는 삶의 세계와 환자들이 살고 있는 세계, 특히 그 중에서도 가난의 굴레 속에서 살고 있는 환자들과의 거리를 극복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과 태도에 기반한 극복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13]. 말하자면, 사회적 역량은 의사가 저소득층의 만성 환자와의 치료적 관계를 성립하기 위해서 삶의 지평이 다른 두 그룹간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그 과정이다. 아울러 여기에서는 의료인들이 이러한 저소득층을 위한 문제해결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의료제도를 보다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도 한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결과적으로 의사의 사회적 역량은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능력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예를 살펴보자. 최근에 폴란드에서는 의료인들이 사회적 역량에 대한 선행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연구[14]는 멧젝(Matczak)이 고안한 Social Competence Question (SCQ)을 사용하여 상황에 따른 의료인들의 적응능력을 측정하고 있다. SCQ는 세 가지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첫 번째 영역은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의 효과적 행동을 위한 조절역량, 두 번째 영역은 사회적 관계에서의 능력 그리고 세 번째 영역은 자기주장에 관한 것이다. 이 연구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일반적인 분류인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 의사소통능력만을 측정한 것이 아니라, 자기주장 능력, 자기표현, 외분 또는 외향성을 함께 측정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직까지 사회적 역량에 대한 고정되고 단일화된 명확한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역량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기술이나 사회적 능력 등으로 혼용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의료인은 항상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인간과의 상호작용 또는 의사소통능력은 의료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역량이라고 볼 수 있다. 폴란드에서 수행된 연구는 비록 선행연구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사회적 역량의 중요성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의료서비스의 향상을 위해서 사회적 역량을 증가시켜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미의 경우, 의과대학 입학시험에서 종래의 방식대신 Multiple Mini Interview (MMI)라는 새로운 형태의 면접방법으로 사회적 역량을 측정하는 것은 사회적 역량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15]. MMI는 종래의 상투적인 면접을 지양하고 임상에서 OSCE (Objective Structured Clinical Examination)와 같이 여러 개의 독립된 방에서 각각 한 개의 주제를 갖고 간략한 면접을 시행 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과학적, 임상적 또는 중등교육에서 받은 학습성과를 측정하지 않고 사회적인 사안 또는 윤리적인 문제 등을 학생들이 어떻게 해결하지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의과대학 학생을 선발하고 있다.
전공의 교육과 사회적 역량
2008년은 의사면허 발부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었으며, 특히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자체적인 연구 과제를 통하여 우리나라 전공의 교육의 공통역량개발에 대한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리고 의사면허 발부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과제를 '전공의 공통역량 RESPECT 100'이라고 명명하였다. RESPECT 100에서 'RESPECT'는 현재 우리 전공의 교육이 처해있는 극도의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문화를 탈피하고 전공의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RESPECT의 철자 하나하나를 따서 전공의 공통역량을 풀어나갔다. 간략히 설명하면, R은 'respect'을, E는 'ethic'을, S는 환자의 안전을 의미하는 'patient safety'을, P는 'professionalism'을, E는 'excellence'을, C는 'communication'을, 그리고 T는 'teamwork'을 가리킨다. RESPECT 100의 역량을 보면 진료와 관계된 역량과 존중, 소통, 팀워크, 교육자 역량 등 비임상적인 사회적 역량이 대거 포함되어 있어 전공의 교육에서 사회적 역량의 강화를 도모 하였다. 이후 RESPECT 100은 꾸준한 개선 작업을 통하여 현재에도 교육자로서의 전공의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회적 역량과 의사상 연구
우리나라의 문화적 특성 중의 하나로 집단적 문화와 불확실성의 회피를 꼽을 수 있다[16]. 우리나라의 의료계도 그러한 특성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그러한 특성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턴과 전공의생활을 하며 의료인 집단의 특성이 더욱 고착되기 시작한다. 졸업 후 교육의 특징은 의국이라는 독특한 단위에서 형성된다. 의국의 문화는 엄격한 수직적 권위주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대게 자유로운 담화나 토론보다는 일방적 소통과 직무수행의 엄격성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의국을 지배하는 기본 가치는 매우 가족적이다. 의국 내 학술활동 이외의 잦은 회합과 정기적이고 주기적인 단합대회 등이 평소의 일방적 의사소통의 약점을 일부 해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의국에 대한 폐쇄적인 사고는 타 의국과의 협조나 병원, 대학 등의 보다 큰 조직체 내부의 소통을 힘들게 하고 의국의 권위를 초월하는 사안에 대하여는 매우 배타적이게 된다. 의국 구성원간의 사회성의 강조는 역으로 의국 외적 사안에 대한 사회성은 매우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에서 배출된 의료와 관련된 각종 단체의 대표자는 의료 외적 분야에서 원활한 소통을 하지 못하는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문제는 의사 개인적인 측면에서, 더 나아가 의사집단의 집단적 역량에서 사회적 역량의 결여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의국을 초월하는 계몽적 행정의 부재에서 성장한 의사는 결국 대 사회적인 협상이나 설득에서도 벼랑 끝 전술의 극단적인 전략으로 귀결되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수렴할 위험성이 있다[8]. 최근에 발간된 '21세기를 위한 의학교육 보고서'에서는 의학교육이 이미 '시대착오적이며 교실이나 의국 간의 협조가 안 되는 종족주의의 산물이 되었으며 사회가 요구하는 의사의 양성보다는 의국이나 교실위주의 사고를 중시'한다고 비판한다[4]. 의국 내의 사회적 역량은 상하 위계질서, 고정된 연공서열의 준수로 과거의 경직된 유교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의국의 폐쇄적인 구조는 사회적 역량의 성장이 아닌 퇴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역량과 의사상: 이론에서 실천으로
의사상을 의료의 현장에서 실제 적용하는 것은 진정한 사회적 역량의 한 부분이다. 세계의학교육연맹이 제시한 의사의 역량 중 하나는 전문직의 자율규제로서 의사상이 곧 의료의 실천으로 옮겨지는 의사집단의 역량이기도 하다. 사회적 실천이라는 개념 하에서 의사상의 의미는 이렇다. 말하자면, 의사상은 의사 전문직과 사회가 적절한 합의에 의해 도달한 의사의 '덕목'과 '역할'에 대한 규명과 개념 정립이다. 의사상은 덕목이 바탕이 되는 가치와 윤리적 바탕에 의한 의무의 두 가지 사안에 대한 기술일 뿐만 아니라 의사의 직무와 직, 간접적인 관련을 갖는다. 역량은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행동적인 절차와 도구를 의미한다. 의사상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면 의사의 임상적 역량과 비임상적 역량인 사회적 역량의 결합체이다. 의사상은 단순한 역량의 제시에서 끝나지 않는다. 의사상이 의사의 덕목과 역할로 규정된다면, 이를 바탕으로 설립한 기준은 다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과 가치가 위주인 추상적인 것으로 구분 할 수 있다. 구체적인 행동적 내용은 의사로서 의무를 그리고 추상적인 내용은 바람직한 가치에 대한 설정이다. 의사상은 다시 역량으로 표현되어 현대적 의학교육의 목표가 되어 종래의 분절된 기본의학, 졸업후의학, 평생의학교육의 공통된 목표로 설정되고 한 나라의 윤리를 바탕으로 한 의료의 기준으로 사용된다. 의사상의 설정과 기준의 설정은 그 자체가 바로 의사 집단의 사회적 역량의 전범이며, 이것을 실제 의료현장과 합치시키는 것이 바로 의사전문직의 사회적 역량이다.
결론
최근 의학교육은 성과바탕학습 혹은 역량바탕학습을 지향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역량이라는 것은 한나라의 의사상을 설정하고 설정된 의사상 내에는 기존의 임상적인 역량과 비임상적인 역량, 즉 사회적 역량에 관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이미 의료가 의료인에 국한된 사안이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로써 의사는 사회와 더불어 번성할 수 있고 참살이가 가능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먼저 시대적 변화를 겪은 영미 문화권의 등에서는 의사들에게 기존의 진료적 역량에서 탈피하여 보다 포괄적이고 넓은 역량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전문직 자체의 생존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고 사회적 역량을 강화하여 소속 사회의 번성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 논문에서는 선진국에서 제시하는 의사상에 관한 여러 내용이 사실상 기존의 타 학문 분야에서 이미 논하고 있던 사회적 역량을 의료 상황에 매우 구체적으로 설정한 것이라는 주장을 개진하였으며, 이를 통해 의사의 포괄적 역량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하였다. 이것은 또한 향후 우리나라도 의사의 보다 광범위한 역할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 되기 위한 기초적인 해설을 제공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의료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의료보험제도의 발달을 의료제도의 발전으로 인식하는 정부, 사회, 그리고 불합리한 제도에서 개선보다는 투쟁방식 이외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현재의 숨막히는 의료제도에서 사회성 결여를 시대적 동시성으로 담고 있는 사회와 정부의 인식을 바꾸기 위 하여는 전문직부터 사회적 역량을 함양하여 사회를 설득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갈등의 일상화를 경험하는 우리 사회에서 한국 의료계의 미래지향적 과제는 바로 의사의 사회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Peer Reviewers' Commentary
본 논문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의사의 역할과 역량을 규정하고 바람직한 의사상을 정립하는데 있어 소통, 협력, 전문직업성 등과 같은 보다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비임상적 역량은 의사상 정립의 또 다른 핵심 역량이며 이것을 사회적 역량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 역량의 결여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회적 역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의료전문직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적 역량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의사상 정립과 더불어 이를 기초로 한 기본의학교육과 전공의 과정에서의 교육 강화가 필요하다고 제시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리: 편집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