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다양한 환경조건에 따라 기생충 감염의 종류와 그 감염률이 끊임없이 영향을 받아 변화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시대의 변천에 따른 기생충 감염 실태에 대한 과학적 자료를 축적하는 것은 사람 기생충에 대한 전반적 이해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명확히 구명하기 위해서는 현대적인 기생충 감염예방 및 치료법이 나오기 이전 시대의 기생충 감염실태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데, 이는 전통적 기생충 연구기법만으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수습된 시료에 대하여 기생충학적 연구를 수행하여 과거 기생충 감염실태를 과학적으로 구명하고자 하는 고고기생충학적 연구기법(paleoparasitological study)은 매우 중요하다. 이에 따르면 기생충학자는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얻어진 시료에 대하여 다양한 분석을 시행하여 과거 기생충 감염실태에 대한 객관적 증거를 획득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람 기생충 감염실태를 시간의 변천에 따라 과학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연구진은 2007년부터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수습된 다양한 시료를 대상으로 고고기생충학적 연구를 수행하여 우리나라 과거 기생충 감염실태를 유추할 수 있는 일련의 과학적 증거를 얻었다[
123456]. 이러한 연구성과가 축적됨에 따라 과거 막연한 추정에만 의존하던 우리나라 근대 이전 기생충 감염실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고고기생충학적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를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종류의 흡충(trematode)에 감염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
Table 1), 간흡충(
Clonorchis sinensis)과 폐흡충(
Paragonimus westermani)의 경우에는 그 감염률이 무려 27.8% 에 달하였다[
6]. 물론 흡충 감염은 검사지역에 중간숙주의 존재여부와 생식습관의 유무 등 지역에 따른 편차가 클 것이라 예상 되므로 일괄적으로 조선시대에 매우 높은 감염률이 유지되었을 것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처럼 고고기생충학적 연구에서 흡충 감염이 빈번히 확인된 다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이 기생충질환이 심각한 건강문제의 하나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분석 정보만으로는 조선시대 흡충 감염이 어떠한 이유로 이처럼 자주 관찰되는 것일까 하는데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남아 있는 문헌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사를 구체적으로 고찰함으로써 당시 흡충류 감염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회적 정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역사문헌학적 고찰은 관련 연구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7]. 임상의학적 역학조사(epidemiological study)가 조선시대의 높은 흡충류 감염 원인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연구야 말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현실적으로 거의 유일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겠다.
본 연구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현존하는 조선시대 문헌을 폭넓게 고찰하여 조선시대 흡충류 감염이 높게 유지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사회적 조건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결과 및 고찰
조선시대 역사기록을 검토한 결과 당시 사람들은 민물에서 나는 어패류 및 갑각류를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보다 훨씬 즐겨 먹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조선시대 사람들 사이에 일상화 되어 있는 날것 상태의 민물 식재료 섭취는 다음 기록에서 잘 볼 수 있다.
징거미 [川蝦]는 바로 하천의 수염이 길고 발이 긴 새우이다. 큰 것은 몇 치쯤 되는데 살이 통통하고 흑갈색이다. 어부가 투망질을 하여 물고기를 잡을 때 고기 사이에 섞여 나오는데 소금에 절이려고 생각도 않고 회 삼아 산채로 삼킨다 [川蝦, 卽川中長鬚長足蝦。大可數寸, 甚肥, 色黑褐。漁人綱漁, 與魚間出, 活喫爲膾, 不藉鹽醬。](『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服食類 諸膳」)
조선시대 사람들의 이와 같은 질박한 식습관은 당시 사회에서 흡충류 감염률을 높이는 원인의 하나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흡충류 감염에 영향을 준 날것 상태의 어패류 및 갑각류 섭취는 위와 같이 단순한 방식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 민물 어패류 및 갑각류를 익히지 않고 음식이나 약제로 사용한 사례도 많아 날것 상태의 민물 식재료를 해당 시기 사람들이 섭취할 기회는 생각보다 훨씬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8]. 조선시대 문헌에서 흡충류 감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례를 식재료 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민물생선
우리나라 흡충 감염의 가장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민물 생선을 날로 먹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선회를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먹지 않았고 일제 강점기 이후에야 비로소 일본의 조리법이 들어와 정착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조선시대 의서인 『의방유취(醫方類聚)』 를 보면 "대체로 생선회는 날 것이며 찬 음식이라 먹으면 입이 개운하기에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생선회는 의외로 오래전부터 즐기던 요리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문헌에는 생선회를 즐기는 기쁨을 한시로 노래하는 등 이에 자세한 기록이 보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Appendix 2).
조선시대 기록을 검토하면 횟감이 된 생선 어족의 종류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이로부터 실제로 흡충 감염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생선 종류를 구체적으로 유추정해 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즐겼던 민물생선회 중 이러한 예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잉어과 어족인 붕어회이다. 기록을 보면 사대부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붕어회가 안주로 오르기도 했고, 조정에서도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가 수라(水刺)를 잘 들지 못하자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이 붕어회를 권한 내용이 보이는 등 조선시대 당시 붕어는 횟감으로 많이 사랑 받았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Appendix 2).
붕어 외에도 요코가와흡충의 중간숙주인 은어 [銀口魚] 역시 조선시대에 회로 즐긴 기록이 많이 보이는 생선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편지에서 "그대는 흥이 일거든 한번 찾아 주시구려. 이 동산에 그득한 죽순이며 소채 배불리 먹고, 한 줄기 개천의 은어는 되는대로 회를 쳐서 맑은 못 곡수(曲水)에서 참말로 술잔을 띄워 흘려 봅시다[願足下乘興而來。喫緊此滿園筍蔬, 鱠錯一川銀口魚, 眞正流觴泛巵於淸池曲水之上。]." (朴趾源 『燕巖集』 卷3 「孔雀館文稿書 與人」)라고 하여 은어회를 즐기는 소회를 표현하였다. 한편, 농어 역시 이형흡충류(heterophyid trematodes)의 중간숙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회로 요리하여 먹는 내용도 당시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丁若鏞 『茶山詩文集』 卷6詩 「松坡酬酢」).
이 외에도 웅어, 가물치, 쏘가리 등 다양한 민물고기를 횟감으로 즐긴 내용이 조선시대 문헌에 확인된다. 붕어나 은어와 달리 이들 생선은 기생충 감염과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이 그만큼 다양한 민물 어족을 생선회로 먹었다는 방증은 될 수 있으므로 이 시기 흡충 감염과 관련하여 암시하는 바가 많다고 하겠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생선회에 대한 기록이 매우 구체적이어서 생선회 조리법까지 자세하게 다루어진 경우도 많다.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붕어회[鯽膾]」 라는 시에서 붕어회를 채를 썰 듯 가늘게 썰어 먹었다고 하였다. 이 외에 몇 가지 양념을 함께 써서 생선회를 조리 해먹은 경우도 기록에 보인다. 성현(成俔, 1439-1504)은 자신의 시에서 은어회를 먹는 모습을 노래했는데 은어를 간단하게 회를 썰어 양념에 채소를 곁들여 먹었다고 한다. 또 다른 조리법 중에는 회 친 생선을 간장, 겨자, 생강 등으로 양념하여 먹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 등 오늘날의 생선회 조리법과 일견 상당히 유사한 장면도 많아서 조선 시대에 생선회를 즐기는 음식문화가 상당히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ppendix 3).
요약하면 생선회의 경우 일제 강점기 이후에나 많이 먹었으리라는 통념과는 달리 역사문헌을 상고해 보면 조선시대에 이미 다양한 민물 어족을 회로 조리하여 많이 즐기고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음식은 조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겠지만, 흡충 감염률 역시 이로 말미암아 함께 높아졌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2. 민물 게
고고학 발굴에서 얻어진 조선시대 고고기생충학 시료에서 상당히 많은 폐흡충 감염 사례가 확인되어 당시 사람들에게 이 질병이 만연했다는 것이 확인된 바 있다[
6]. 폐흡충은 주로 민물 갑각류(가재, 게 등)를 생식할 때 감염되는 질병임을 감안할 때 조선시대 폐흡충 감염률이 높았던 사실은 당시 사람들이 이들 갑각류를 날로 많이 섭취하는 사회적 조건 아래 놓여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 폐흡충 감염원으로 빼 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민물 게인데, 그중에서도 게의 생식과 관련하여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음식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게젓과 게장이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게를 익히지 않고 날것 상태에서 게장으로 조리하여 즐긴 기록이 많은데 이르게는 조선초 서거정이 지은 「촌주팔영(村廚八詠)」 이라는 연작시에 이미 게젓 [蟹醢]을 노래한 부분이 있다(
Appendix 4).
조선시대에는 게장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담갔을까? 이에 대해서는 『산림경제(山林經濟)』,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및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에 자세한 조리법이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장초 게장[醬醋蟹], 간장 게장[醬蟹], 소금물 게장[鹽湯蟹], 법해(法蟹), 술에 재운 게장[酒蟹] 등 다양한 종류의 게장이 만들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소금물, 간장, 식초, 술지게미 등 식재료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게장의 경우 간장이나 소금물처럼 짠 재료에 상당히 오래 담가둔 후 비로소 먹기 시작하기 때문에 과연 이를 먹고 폐흡충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았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증보산림경제』 를 보면 조선시대에 반드시 오래 담가두었다 먹는 게장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담근지 아주 짧은 시간만 경과해도 바로 먹을 수 있는 게장도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Appendix 4)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나라 민간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오던 게장 만드는 법을 그대로 채록해 놓았다는 '장해속법(醬蟹俗法)'은 주목할 만하다. 이 게장 조리법에서 중요한 점은 소금, 간장 등을 이용하여 담근 지 5, 6일이면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는 살아 있는 폐흡충 피낭유충에 의한 감염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므로 조선시대 민간에서 이 방법대로 게장을 담가 먹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았다면 폐흡충 감염확률이 이로 인해 매우 높아졌을 것이다.
3. 민물 가재
민물 게뿐 아니라 민물 가재의 경우도 날것으로 섭취하면 조선시대 폐흡충 감염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홍역(紅疫)을 앓을 때 민물 가재를 날로 먹으면 낫는다는 민간치료법이 최근까지도 성행하고 있었던 것이 의학계에 잘 알려 져 있어 우리나라 전근대 시대 폐흡충 감염 원인의 하나로 이 부분이 곧잘 거론되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기록을 보면 민물 가재를 홍역에 쓰는 치료법은 폐흡충을 유발하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지적이 의학자를 중심으로 반복 제기된 부분이 보이고, 같은 지적은 1960년대, 1970년대까지도 언론에 계속 확인되므로 이 전통은 상당히 최근까지 지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기록을 상고할 때 홍역에 가재즙을 처방하는 치료법은 1871년에 간행된 『의휘(宜彙)』의 기록에서 처음 보이는 듯하다. 이에 의하면 "홍역이 돌 때에는 석해를-가재-즙을 내어 뜨뜻하게 하여 이를 복용한다. 전염되지 않은 사람은 더러 모면할 수 있고, 이미 걸린 사람은 증세가 경미해진다 [疹疫輪行時, 石蟹取汁, 微溫服之。不染者或得免, 已中者卽輕]."(錦里散人, 『宜彙』 卷4 『「麻疹經驗』 『紅疹新方」』,1871)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홍역 치료를 위해 가재즙을 복용하는 전통은 최소한 19세기 후반까지는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가재를 날로 즙을 내어 먹는 치료법은 홍역에만 이용되었는가? 그렇지는 않은 듯하고 홍역 외에도 다양한 질병 치료제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동의보감 (東醫寶鑑)』 에는 인후(咽喉) 질환에 사용하는 28종의 단방(單方)이 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처방이 있다. 이 처방을 따를 경우 조선시대 인후통 환자에게 가재즙이 치료제로 제공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석해(石蟹)를 쓴다. ○ 목구멍이 부어서 막힌 것을 치료한다. 찧어 짜서 즙을 내어 흘려 넣으면 바로 트인다〔石蟹 ○ 治咽喉腫塞。擣絞取汁灌之卽開。 【本草】〕." (許浚 『東醫寶鑑』 「外 形8 咽喉」)
조선시대에 가재즙을 처방하던 질병에는 홍역과 인후통 외에 이질도 있었던 것 같다. 1790년(정조14)에 이경화(李景華, 1721-?)가 함경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 1742-1806)의 의뢰로 편찬한 『광제비급(廣濟秘笈)』을 보면 적리(赤鯉)로 피고름이 겹쌓이고 이급(裏急)으로 뒤가 묵직하며 밤낮으로 계속 설사를 할 때에는....또 석해를-가재-짓찧어 즙을 내어 묽은 간장을 넣어 국을 만들어 공복에 마신다[赤痢, 膿血稠疊, 裏急後重, 日夜無度, ...... 又石蟹[가재]擣取汁, 淡醬作羹, 空心服]. (李景華 『廣濟秘笈』 卷2 『雜病』)라고 되어 있어 적리(아메바성 이질)의 치료에 가재즙을 처방하였던 듯하다. 이러한 처방은 『단방비요경험신편(單方秘要經驗新編)』 등 조선 말, 일제강점기 의서에까지 계속 보여 상당히 후대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당시 의서에 나오는 처방에 따라 가재즙을 의료용으로 처방한 사례가 어느 정도일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의서대로 홍역, 인후통, 적리 등을 앓는 환자에게 가재즙을 처방하였다면 이 부분이 당시 우리나라 폐흡충 감염률을 높이는 데 있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4. 생굴
참굴큰입흡충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확인되어 국제학계에 보고된 흡충으로서 한반도 남서부 도서 지역을 중심으로 감염된 2차 중간숙주가 분포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실 참굴큰입흡충 감염의 지역적 분포는 조선시대라고 해서 큰 차이를 보일 것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참굴큰입흡충에 감염된 2차 중간 숙주가 분포한 남서부 도서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인 경남 하동과 충남 서천지역에서 조선시대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이로부터 얻은 분변 샘플에서 놀랍게도 참굴큰입흡충이 확인되었다. 이는 조선시대 참굴큰입흡충 감염이 지금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하여 한반도 서해안 및 남해안 상당 부분이 이 기생충의 감염권 안에 포함되어 있었고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그 분포범위가 점차 축소되어 오늘에 이르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25].
참굴큰입흡충 감염의 2차 중간숙주가 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흡충에 감염되는 데 있어 중요한 부분은 현지 생 산된 굴이 참굴큰입흡충에 오염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채취 한 굴을 익히지 않고 섭취하는 식습관이 사람들 사이에 유지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 중 전자의 경우 현재로서는 그 오염유무를 알 방법이 없지만, 후자의 경우는 조선시대 문헌에 대한 조사를 통해서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굴을 어떻게 조리하여 먹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증보산림경제』에 아래와 같이 상세히 나와 있다.
굴[石花]: 이른 봄이나 가을, 겨울에 먹을 수 있다. 초장으로 회를 만들어 먹으면 맛있지만, 그 성질이 너무 차서 밥 위에 쪄서 소금을 뿌리고 바로 먹으면 맛이 좋다. 특히 두붓국에 넣어 함께 삶으면 좋다. 혹자는 손질하여 껍데기를 제거하고 소금을 조금 뿌려 따뜻한 방에 며칠 두었다가 고춧가루 [蠻椒]를 넣어 먹는다[石花: 早春及秋冬可食.以醋醬作膾則佳, 而性太冷, 或蒸於飯上, 和鹽卽食佳.又宜加於同煮豆腐羹中.或治去辟甲, 少和鹽, 置溫房數日, 加蠻椒食之.] (柳重臨 『增補山林經濟』 卷9 「治膳 下 石花」)].
이에 의하면 굴을 먹는 방법에는 날 것 그대로 양념을 하여 먹는 방법, 밥과 함께 삶거나 쪄서 먹는 방법, 소금을 쳐두고 며칠 지나 고춧가루와 함께 먹는 방법이 있다. 이 중에서 밥과 함께 쪄 먹는다면 참굴큰입흡충의 감염에 별로 관련이 없겠지만 회로 만들어 먹거나 따뜻한 방에 며칠 숙성시켜 두었다가 먹는 경우가 역시 문제이다. 굴을 날로 먹는 방법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며 굴젓을 담아 먹는 방법도 있었다. 이 방법 역시 참굴큰입흡충의 감염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 조리법을 아래에 적어둔다.
굴젓 담그기 [沉陳石花醢法]: 굴 1말에 소금 7되를 넣는데, 켜켜이 굴을 깔고 소금을 뿌려 항아리 주둥이까지 가득 채운다. 기름종이로 단단히 봉해서 해가 들지 않는 처마 밑에 항아리를 두면 1년이 지나서 먹어도 맛이 좋다 [每石花一斗, 加鹽七升, 爲層層隔鋪, 滿至甕口。以油紙堅封, 安甕於不照日之廊下 周年而食之佳。]. (柳重臨 『增補山林經濟』 卷9 「治膳).
참굴큰입흡충에 감염된 조선시대 미라 사례는 현재까지 총 2구(柩)가 확인되었는데, 두 경우 모두 바닷가와 매우 가까운 지역이어서 피장자는 생굴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 보듯이 생굴을 회나 굴젓으로 생식하는 습관이 조선시대 사람들 사이에 폭넓게 퍼져 있었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해안 지역 사람들은 생굴 섭취를 통해 참굴큰입흡충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많았으리라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