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보건의료정책의 목록에서 건강불평등 완화가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한 건강과 관련된 국제기구는 물론이고, 국가 차원에서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 건강불평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의제가 되었다고 보기 어렵지만, 조만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 틀림없다.
건강불평등의 현상과 과제는 개인보다는 주로 인구집단을 다룬다. 불평등이라는 현상 자체가 분포를 말하는 것이므로 개인보다는 집단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원인도 개인 요인보다는 사회적 요인에 더 큰 관심을 둔다. 주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social determinants of health)이 작용한 결과 건강불평등이 초래된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결정요인을 중심으로 건강불평등을 이해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이나 방법도 사회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당연하다. 소득, 학력, 직업, 인종, 주거 등이 대표적인 사회적 결정요인이자 개입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이 때문에 건강불평등 완화전략은 흔히 보건의료를 넘어 여러 영역, 예를 들어 경제, 교육, 고용과 노동, 지역개발, 정치 등을 포괄하게 된다. 또한 이 때문에 정책과 체계라는 거시적 수준의 개입이 주된 전략이 될 수밖에 없다.
건강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이 포괄적이고 거시적 특성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 때문에 건강불평등 완화를 위한 전략이 한계를 갖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중 하나가 개인 수준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개입방법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이중적 의미에서 그렇다. 우선, 포괄성은 개별 영역을 넘어 다른 분야의 문제까지 다루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대체로 각 개인이 개입하거나 실천할 범위를 넘는다. 보건의료 전문가가 노동이나 조세 문제에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어렵다. 아울러, 거시적 접근이 중요하다는 특성도 특히 실천과 개입의 주체라는 측면에서 때로 제약요인으로 작용한다. 건강불평등 완화전략은 흔히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상위의 정책이나 체계에 관심을 가진다.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조세 구조를 좀 더 누진적으로 바꾼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조직화되지 않은 개인이 정책이나 체계를 바꾸는 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는 그리 크지 않다.
꼭 불평등 문제가 아니더라도 의료전문가가 건강과 보건의료 영역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의사는 개인 또는 팀의 리더로 건강과 보건의료 문제 해결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의사(다른 의료전문직도 마찬가지다)가 건강불평등 완화전략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특히 환자진료를 주된 임무로 하는 대부분 임상의사, 그 중에서도 일차진료를 담당하는 의사에게 건강불평등은 핵심 또는 중요 업무가 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2011년 세계의사협회 총회에서 결의한 것처럼 의사의 역할은 건강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사회적 결정요인에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포함한다[1]. 특히 의료가 건강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회적 요인에 속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2]. 즉, 환자를 치료하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의사의 활동은 그 자체로 건강불평등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결정요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건강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전략에서 의사의 역할이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일반적 시각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의사의 역할은 더 적극적이고 폭 넓은 것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료에 종사하는 대부분 의사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의사의 역할은 건강불평등 완화를 위한 포괄적 전략을 전제로 하면서도 현실 여건과 실용성을 중요한 요소로 고려하여야 한다.
고리 끊기: 사회적 결정요인과 불평등의 경로
주로 진료업무에 종사하는 의사가 일하는 일차적 공간은 넓더라도 의료시설 내부이다. 그리고 핵심 업무는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다. 앞으로 건강과 의료의 새로운 틀이 만들어지면 이러한 조건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공간과 업무의 제약을 전제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제약조건을 고려하면, 의사가 건강불평등에 개입하는 상황은 대부분 진료과정을 중심으로 한다. Chin 등[3]은 이런 맥락에서 건강불평등과 관련된 진료과정을 지역사회와 의료조직, 환자와 의사라는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였다. 물론 이들 요소와 상호작용에는 다양한 정치, 사회, 문화적 요인들은 물론 보건의료체계와 지역사회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진료과정은 사회적 결정요인과 건강(또는 보건의료) 결과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4]. 진료과정 이외에도 환자의 행태나 접근성 역시 매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양한 사회적 결정요인들은 이러한 매개 요인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건강 또는 보건의료 이용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건강불평등 완화를 위한 의사의 핵심 역할은 사회적 결정요인과 건강불평등을 매개하는 요소들을 변화시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1. 환자의 행태
건강불평등과 행태의 관계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질병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결정요인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경제적 요인에 따라 건강행태의 분포가 다르다고 할 때에는 이런 측면에서 건강행태를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계층에서 흡연율이 높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건강행태는 사회적 요인과 건강불평등을 매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여기서 건강행태는 불평등한 결과가 아니라 건강불평등이 만들어지는 경로라는 성격을 갖는다. 특히 강조할 것은, 경로라는 표현이 나타내듯, 행태는 어느 정도까지는 수정할 수 있는 요인이라는 점이다. 익숙한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고혈압이나 당뇨병, 암 등의 발병률은 소득 수준에 반비례하고, 이 때 흡연은 불평등한 분포가 나타나게 하는 중요한 요소(매개 요인)로 작용한다. 즉, 저소득층의 흡연율이 더 높고 이는 이들에게서 발병률이 더 높은 이유 중 일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소득이 낮다 하더라도 모두가 흡연자인 것은 아니며, 흡연자도 금연을 하면 건강결과를 향상시킬 수 있다. 따라서 행태를 개선하는 것은, 비록 사회적 결정요인 자체를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건강결과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는 역할을 한다.
건강행태를 다루는 것은 어떤 영역이든 의사의 일상적 업무 중 하나라고 할 것이다. 또한 불평등과 무관하게 건강행태는 모든 환자의 건강관리와 치료의 핵심 요소로 포함된다. 그러나 건강불평등이라는 관점에서 건강행태는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유력한 개입 지점이 된다. 따라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은 건강불평등에 취약한 인구집단의 건강행태를 개선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2. 접근성
의료에 대한 접근성 역시 사회적 결정요인과 건강불평등 사이를 매개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예를 들어 빈곤이라는 사회적 결정요인은 의료 이용을 접근성을 낮추고, 그 결과 건강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따라서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면, 사회적 결정요인(빈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건강불평등을 완화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접근성은 매우 복합적인 개념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정의하고 측정해야 한다. 개념적으로는 동등한 의료이용의 필요를 가진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정도를 접근성의 형평이라고 말한다[5]. 전통적으로 접근성은 지리적 접근성과 경제적 접근성이 관심의 초점이었다. 현재도 이런 측면의 접근성이 중요한 관심이자 과제인 것은 다르지 않다. 농촌 지역에 보건의료자원이 부족하여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비용 때문에 필요한 의료이용을 못했다는 것은 경제적 접근성을 대표한다. 이러한 지리적, 경제적 접근성에 비해 한국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것이 사회적, 문화적 접근성이다. 이것은 주로 의료이용을 촉진하거나 방해하는 사회적, 문화적 요인을 가리킨다.
지리적, 경제적 접근성이 주로 구조와 정책적 개입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사회적, 문화적 접근성은 환자와 의료인의 특성을 더 많이 반영한다. 대표적인 것이 언어로, 환자와 의사 사이에 언어의 장벽이 있으면 접근성은 크게 떨어진다. 문화나 가치체계의 간격이 클 때에도 적절한 의료이용을 보장하기 어렵다. 사회적, 문화적 접근성이 떨어지면 의료나 보건사업의 효과도 충분하게 성취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운동을 처방하고 프로그램을 충분하게 제공하더라도 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접근성은 올라가지 않는다.
사회적, 문화적 접근성의 측면에서 건강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문화적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6]. 문화적 능력은 환자와 행태에 미치는 사회적, 문화적 요소의 영향력을 이해하고, 보건의료체계의 여러 수준에서 이들 요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고려하며, 양질의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이들 요소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7]. Betancourt 등[7]은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데에 개입할 수 있는 문화적 능력을 조직, 구조, 임상 수준으로 구분하였다. 조직 수준의 문화적 능력이란 지도력과 다양한 직원을 고용하는 것 등을 포함하고, 구조 수준에서는 통역, 문화나 언어 측면에서 적절한 교육자료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임상 수준에서는 환자의 가치체계나 행태를 이해하고 이에 맞추어 진료할 수 있도록 의료 제공자가 적절한 지식과 기술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3. 진료과정
진료과정은 물리적 환경, 환자, 의사 등이 함께 만들어내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다. 앞에서 다룬 환자의 행태나 접근성도 크게 보면 진료과정과 분리되기 어렵다. 이뿐 아니라, 물리적, 사회적 환경을 비롯한 진료 환경도 진료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는 범위를 좁혀 주로 환자-의사의 상호관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진료과정 역시 사회적 결정요인과 불평등을 잇는 매개 요인이라는 것은 행태나 접근성과 같다. 이 과정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따라 불평등의 정도가 달라진다.
Stewart 등[8]은 환자-의사의 상호작용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었는데, 의사소통, 의사결정, 대인관계의 방식이 그것이다. 각각의 범주를 구성하는 세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이 요소들 중 일부는 접근성에서 다룬 내용과 겹친다. 진료과정과 접근성이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대인관계의 방식
- 친밀성
- 존중
- 차별
- 문화적 민감성
- 정서적 지지
각각의 항목에서 의사는 불평등을 심화시키거나 완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사결정 과정에서 환자의 선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 환자가 치료방침을 따르는 정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의사와 환자의 사회적 배경이 다르면 환자의 선호를 민감하게 고려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고 그 결과 순응도를 비롯한 치료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때 이러한 진료과정은 당연히 불평등을 심화 또는 완화시키는 매개 요소로 작동한다.
진료과정에서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주로 의사의 역할에 달려 있다. 의사의 역할과 그 영향은 불평등과 연관된 인식과 태도, 이를 완화시키는 데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진료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요소들은 불평등에 특수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료의 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접근은 불평등에 한정된 것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다[8].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데에 작용하는 의사와 의료팀의 역할은 조직의 사명, 비전,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영향을 받는다[9]. 또한, 진료의 구조와 정책과 같은 환경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의료팀의 교육과 훈련, 시간계획을 비롯한 진료과정의 개선 등도 중요하게 고려할 사항이다. 결국 진료과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내외부 환경을 포함한 여러 요소를 같이 고려하는 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
4. 형평성 능력의 강화
앞에서 행태, 접근성, 진료과정을 살펴보았지만, 이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긴밀한 상호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행태-접근성-진료과정이라는 요인은 위에서 설명한 범위를 넘어 훨씬 복잡한 요인들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이처럼 몇 가지 요소로 나누어 요소를 이끌어내는 것은 분명히 이점이 있지만, 현실의 진료과정에서 의사가 해야 할 역할은 이런 도식화된 모형의 범위를 넘는다. 특히 대부분의 요구가 맥락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구체적인 환경과 조건에 맞춘 구체적인 접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건강불평등 완화를 위한 의사의 역할을 설명하는 통합적 틀로 형평성 능력(equity capacity) 개념을 제안하고자 한다[9]. 이는 아직 초보적인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잠정적인 것이지만, 앞으로 이론적, 실천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개념적으로 형평성 능력이 뜻하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문화적 능력과 비슷한데, 구체적인 실천 지침이라기보다는 실천의 기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형평성 능력을 정의하면, 환자의 건강과 의료이용에 미치는 사회적 결정요인들의 영향력을 이해하고, 건강과 보건의료가 산출되는 과정의 여러 수준에서 이들 요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고려하며, 양질의 의료를 제공하고 더 나은 건강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이들 요소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형평성 능력은 한편으로 주류화 또는 형평성에 기반을 둔 전략 개념과 친화성을 가진다. 주류화는 주로 젠더(gender)와 관련되어서 발전해 온 개념이지만, 문제의식이 비슷한 만큼 건강 형평성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10]. 유엔 경제사회이사회가 정의한 것에 따르면 젠더 주류화는 법률, 정책, 사업을 포함한 모든 실천계획의 모든 수준에서 여성과 남성에 미치는 영향(함의)을 평가하는 과정을 말한다[11]. 건강 형평성에 적용하면, 주류화는 법률, 정책, 사업을 포함한 모든 실천계획의 모든 수준에서 건강과 보건의료의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형평성에 기반을 둔 전략은 평가보다는 실천을 더 강조한다는 점에서 주류화 개념과 보완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형평성 능력은 이러한 주류화와 형평성에 기반을 둔 전략 개념을 대부분 포함한다. 구체적으로는 불평등이 만들어지는 원인과 경로를 이해하고, 환자를 진료하고 관리하는 데에 관련 요소를 고려하고 적용하며, 더 좋은 결과를 위하여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뜻한다. 빈곤층이나 결혼이주 여성을 진료할 때 형평성 능력이 건강 형평성을 향상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실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환경 조성과 지원
진료를 주업으로 하는 대부분 의사는 진료실을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이를 지원하거나 환경을 만드는 데에도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지원이나 환경 조성을 진료와 구분되는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이러한 활동은 때로는 촉진 요인으로 또 다른 때에는 제약 요인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1. 진료의 지원
진료과정에서 형평성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개인 의사의 노력과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외국인 환자에게 해당 외국어로 된 설명문이나 교육 자료를 제공하는 것은 불평등 완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 의사나 의료기관에서 이를 제대로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건강불평등에 관련된 역할을 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을 익히고 정보를 얻는 것도 마찬가지다.
진료를 지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중앙 정부를 비롯한 공공기관이 주된 책임을 가진다. 그러나 의사단체나 학술단체 역시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의사협회가 의사들의 문화적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12].
2. 연구와 교육
건강불평등이 의학 연구와 교육, 훈련의 중요한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학부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우선은 그 기반을 구축해야 하는데, 의학 연구와 교육에 참여하는 의사들이 건강불평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학술과 기술적 역량을 배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지역사회 참여
지역사회는 건강불평등이 발생하고 진행되는 현장이자 의사가 간여하고 개입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 의료기관 인근에서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비슷한 건강 문제가 계속 생긴다면, 사회적 결정요인의 관점에서는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건강 향상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 때 의사는 누구보다 강력한 변화의 주창자이자 지원자가 될 수 있다. 산업장이나 학교 등 인구집단에서 자주 발생하는 건강 문제도 사회적 결정요인과 연관된 때가 많다.
때로 지역사회에서 의사는 보건의료의 범위를 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지역사회의 리더나 여론 형성의 주도자로서 다양한 문제에 참여를 요청 받기 때문이다. 의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의료 전문직은 건강 문제를 벗어난 영역에 참여하는 것은 꺼린다. 그러나 건강불평등을 사회적 결정요인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지역사회 참여의 폭과 근거가 크게 확대된다. 예를 들어 의사는 지역사회 구성원의 하나로 환경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이 때 환경이 건강불평등을 초래하는 중요한 사회적 결정요인이라는 시각을 적용하면 건강 전문가로서 의사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4. 정책과정 참여와 지지
정책은 건강불평등을 규정하는 거시적 요소에 속한다. 직접 정책을 만드는 기회는 드물지만, 의사는 정책을 지원하거나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주로 집단적 차원에서 수행하는 역할이긴 해도, 건강 전문가로서 정책을 형성하거나 변화시키는 데에 의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고 잠재력이 크다.
정책은 건강이나 보건의료 정책에 한정되지 않는다. 특히 사회적 결정요인과 건강 결과의 관련성은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에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현재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의제인 비정규직 문제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비정규 노동이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건강 전문가가 비정규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건강 전문가의 시각에서 비정규 노동을 해결하는 정책을 옹호하면 그 영향력은 보통의 정책 참여자가 가질 수 있는 크기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결론
건강불평등 완화는 어느 한 영역이나 일부 집단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통합적이고 협력에 기초한 접근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핵심과 주변이 있을 수 없고, 주역과 조연을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또한 정책과 제도라는 거시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구체적인 개인과 일상적 활동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건강과 보건의료의 불평등은 개인과 지역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그것의 부정적 결과는 현실에서 구체성을 얻기 때문이다.
앞에서 건강불평등을 완화하는 데에 의사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역할은 '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해야 할 것'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과 의무는 달리 보면 건강불평등에만 해당하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의료의 본질인 양질의 의료를 제공하기 데에 필수적인 것이고, 따라서 모든 역할은 양질의 의료라는 틀에 통합된 요소이다. 다만, 능력이나 주류화 개념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진료의 모든 과정과 측면에서 건강불평등과 사회적 결정요인이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된다는 점이 특수하다.
건강불평등 문제를 다루면서 의사의 역할은 여전히 부분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만큼 모든 면에서 준비와 기반이 충분하지 않다.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는 역할 인식 자체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과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첫째, 건강불평등 문제에 접근하는 기본 인식과 전략의 지평을 크게 넓힐 필요가 있다. 세계보건기구의 보고서가 누누이 지적하는 것처럼 개인과 집단의 건강은 사회적 결정요인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는 비단 문제의 원인을 탐구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입과 대안을 모색하는 데에도 적용된다. 소득, 교육, 노동과 고용 등 사회적 결정요인은 물론이고, 임상진료와 관련된 여러 요인들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폭을 크게 넓혀야 할 것이다.
둘째, 한국의 상황, 그것도 실제 의료가 수행되는 현실을 불평등의 관점에서 더욱 넓고 깊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에는 세계보건기구의 보고서가 권고하듯이 측정과 이해, 영향 평가가 모두 포함된다. 문제의 이해와 영향의 평가는 단지 이론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실제적인 기반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저소득층 어린이에서 필요한 임상검사가 상대적으로 덜 수행된다면 개입에 앞서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로와 기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야 한다. 의료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개입이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셋째, 건강불평등 문제를 우선순위가 높은 의제로 만들어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누구나 동의하듯이, 사회적 가치로서의 건강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우선순위가 낮다. 하물며 건강불평등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의학과 의료 내에서 불평등 의제가 차지하는 우선순위도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다. 이는 학술과 연구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공공의 정책이나 민간 부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건강불평등 완화가 중요한 사회적 가치이자 정책과 의료가 지향하여야 하는 목표라면, 의제 자체의 우선순위를 높이지 않고서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우선 연구와 학술활동이 촉매 노릇을 하여야 하겠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공공화/공론화하는 것이 의제의 우선순위를 높이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Peer Reviewers' Commentary
이 논문은 유엔,세계보건기구 등이 추진하고 있는 새천년개발목표와 우리나라를 포함한 선진국의 국가건강정책목표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건강불평등 완화'에 대해 국민건강을 직접적으로 돌보고 있는 의사들의 참여는 의무임을 밝히고 있으며 임상의사 개인 혹은 집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체계적이고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건강불평등이 국민건강에 가장 실체적인 문제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정책이나 보건학 등에서 논의된 적은 있지만 정작 의료계 내부에서는 소개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글은 시의적절하고 본 저널에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많은 임상의사들은 진료실에서 만성질환자를 돌보면서 그들의 건강이 결코 나아질 수 없는 사회경제적 조건들에 대해 임상의사로서의 무기력 혹은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이 점에서 이 글은 환자건강을 돌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시도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과 임상의사로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과 흥미를 줄 것으로 판단된다.
[정리: 편집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