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현재 국내외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건강불평등은 개인들 건강수준의 산술적 차이나 확률적 변이가 아닌,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한 유형화의 결과를 지칭한다. 따라서 건강불평등 완화 정책 이라면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현재 한국사회의 건강불평등 완화 정책과 프로그램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과연 원래의 목표를 충분히 달성하고 있을까? 이 글에서는 한국사회 건강불평등 완화 정책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 향후의 발전 방향을 논하고자 한다.
건강불평등 완화정책이란 무엇인가?
현재 국내외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건강불평등은 개인들 건강수준의 산술적 차이나 확률적 변이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 경제적, 혹은 지리적으로 구분되는 인구집단들 사이에서 체계적이고 잠재적으로 개선 가능한 한 가지 이상의 건강 측면에서 차이가 존재하는 상태를 지칭한다[1]. 때로는 이를 '건강불공평(health inequity)' 혹은 '건강의 사회경제적 불평등(socioeconomic inequalities in health)'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건강차이의 사회경제적 근원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렇게 건강불평등이 생물학적 특성, 확률적 우연에 의한 건강 차이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한 유형화의 결과라면, 건강불평등 완화정책 또한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사회적 결정요인이 건강에 작동하는 과정이나 그 결과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위원회(Commission on Social Determinants of Health, CSDH)가 채택했던 Diderichsen 모형은 이 복잡한 문제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Figure 1에 의하면 우선 1) 사회적 맥락(social context)은 사회의 구조 혹은 사회적 관계들을 지칭하며, 여기에는 노동시장, 교육체계, 정치적 제도, 기타 문화적·사회적 가치들이 포함된다. 노동시장 구조를 포함한 복지국가체계와 재분배정책은 가장 강력한 건강결정요인들에 속한다. 이러한 사회적 맥락은 2) 사회 계층화(social stratification)를 야기한다. 가장 중요한 구조적 계층화와 그 지표들에는 소득, 학력, 직업, 사회계급, 젠더, 인종/민족 등이 포함된다. 계층화는 개인들에게 차별적인 사회적 위치를 부여하고 이는 3) 건강에 유해한 환경에 대한 차별적 폭로(differential exposure), 그리고 4) 건강 조건과 물질적 자원의 가용성 측면에서 차별적 취약성(differential vulnerability)을 낳는다. 이들은 중간 단계 결정요인으로서 개인들이 직면하는 물질적 환경, 사회 심리적 환경, 행태 및 생물학적 요인들과 관련이 있다. 또한 사회적 계층화는 5) 불건강에 대한 차별적 여파(differential consequences)를 낳기도 한다. 보건의료체계는 그 자체로 중요한 사회적 결정요인이면서, 이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2] (Figure 1).
이 모형을 토대로 우리는 건강불평등의 발생 단계에 각기 조응하는 건강불평등 완화정책의 가능한 진입 지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 맥락을 변화시키는 근본적 기획과 사회정책에서부터 차별적 폭로와 취약성의 개선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까지, 고려할 수 있는 수단은 여러 층위에서 다양하게 존재한다.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저소득층의 의료서비스 접근성 향상은 이러한 개념 틀에 비추어본다면 건강불평등 완화정책의 일개 측면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형이 상기시키는 것은, 건강결정요인라는 관점으로부터 보건의료 영역 바깥의 정책들이 오히려 중요하며, 또한 건강불평등을 완화시키는 특별한 맞춤형 정책이 있다기보다 건강강불평등을 고려한 다양한 정책들의 조율과 일관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접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가장 적극적인 건강불평등 완화정책을 시행해왔던 국가들 중 하나인 영국에서조차 지난 정책들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지 않다. Marmot 등[3]은 지난 영국의 건강불평등 완화 노력들이 정책설계와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적 결정요인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고, 예방보다 치료에 더욱 주안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으며, 부문을 넘나들며 건강형평성에 초점을 두는 것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일부 취약계층에 집중할 뿐 전체 기울기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으며, 근시안적 시간 프레임으로 소규모의 정책이나 과제에 집중하면서 빠른 결과물을 보는 것에만 집착했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건강불평등 완화정책은 과연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 건강불평등 완화정책의 현주소
건강이나 건강불평등이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더라도, 정책이나 프로그램의 기획과 시행과정에 그러한 고려가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건강불평등 완화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단순한 수사이든 혹은 암묵적이지만 실질적인 정책이든 간에 범정부 차원에서 건강불평등 완화전략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건강불평등이나 건강을 주요 의제로 국가 전략을 세우거나 여러 부처들 사이에 협력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보건복지 영역 안에서조차 건강불평등 완화정책의 진전 정도는 매우 미흡하다. '새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에 건강형평성 국가목표를 포함시킨 조치가 그나마 지난 10년 간 가장 유의미한 정부의 노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Khang과 Lee [4]의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우선 '2011 보건복지백서'를 통해 보건복지부의 비전과 정책개요들을 살펴보면, 건강불평등이나 형평성, 건강권 같은 표현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장견인이나 산업 육성처럼, 경제부처 혹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들이 담지 해야 할 가치들을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있다. 2011년에 실행된 정책과 사업들의 목록을 살펴보면, 사회안전망이라는 이름으로 빈곤층에게 한정하여 제공한 잔여적 복지서비스들이 그나마 건강불평등과 관계있는 내용들이다. 또한 전반적으로 건강이나 건강결정요인보다는 보건의료정책과 질병정책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한국인의 건강증진 종합전략인 '제3차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Health Plan 2020, HP2020)'은 보건복지정책의 기본 프레임이라기보다 보건복지부가 다루고 있는 수많은 세부 영역들 중 그저 하나일 뿐이다[5]. 실제로 보건복지부 누리집의 정책 자료실에서 '불평등'이나 '형평'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제시되는 정책문서나 보고서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HP2020에서는 건강불평등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건강불평등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매우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무려 800쪽에 이르는 계획서는 첫머리에서 건강증진의 방향을 건강결정요인 중심으로 재편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HP2020이 표방하는 결정요인에 사회적 결정요인은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생활습관이 건강의 가장 중요한 근원적 결정요인이라는 설명까지 등장하며, 정책과 사업의 대부분은 기존의 건강생활실천에 집중되어 있다[6]. 전 세계적으로 건강불평등 완화전략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 할 수 있는 WHO CSDH 최종보고서가 출판된 것이 2008년임에도 불구하고, HP2020에는 이 보고서의 권고들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 문헌의 이름이 그나마 언급된 것은 계획서 전체에 걸쳐 건강영향평가를 소개하는 절에 단 한 번뿐이었다. HP2020의 총괄 목표는 건강수명의 연장과 건강형평성 제고이지만, 중점과제들에는 이와 관련한 내용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HP2020 전략을 마련하는 위원회에 건강불평등 연구자들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WHO CSDH [7]는 개인들의 행태가 아닌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들에 주목하고, 일부 취약집단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닌 불평등 전체의 기울기를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HP2020에서 형평성 문제는 철저하게 취약계층에 집중되어 있다. Figure 2는 앞서 제시된 Diderishcen 모형(Figure 1)과 달리, '인구집단별 건강관리'라는 별도 영역을 통해 취약계층에게 추가적인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건강형평성을 제고하는 것으로 개념화되어 있다. 건강격차 해소 및 건강형평성 제고를 위해 (취약)가정 방문을 통한 건강관리서비스 제공이 건강불평등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업이며, 다른 영역과의 연계는 거의 없다. 일부 영역에 형평성 목표가 추가되기는 했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술이나 수단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전반적인 형평성 완화 전략이 부재한 가운데 이렇게 연계성 없이 나열된 개별 목표들이 달성된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그나마 형평성 관련 목표가 제시되지 않은 항목들이 더 많고, 목표를 제시한 경우에도 국내의 실증연구나 권고를 토대로 삼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부문 간 협력을 가능케 하는 유력한 수단인 건강영향평가(health impact assessment) 부문에서조차 건강불평등에 대한 관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요컨대 건강불평등의 관점에서 볼 때, 개별 사업이나 정책들도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HP2020의 기본 전제와 틀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건강형평성과 관련하여 추상적 수준의 목표만 있을 뿐 구체적 청사진이 없으며 다른 사업과제들과의 연계가 부족한 채 세부추진계획도 의료서비스 중심의 매우 제한적인 내용들로 구성되었다는 제2차 건강증진종합계획(HP2010)에 대한 비판[8], 개인의 건강행태변화 중심으로 사업이 추진되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환경변화에 대한 접근이 미흡하다는 기획예산처의 2004년 건강증진 기금 평가[9]에서 거의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앙정부 차원의 접근이 이렇다보니, 일선 보건현장에서의 건강증진 사업 또한 불평등과 관련된 관점이 취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Shin 등[10]은 전국 250개 보건소의 지역특화건강행태 개선사업 계획서에 대한 평가를 통해, 건강형평성 확보 대책이 명시적으로 기술되고 세부 사업계획 중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사업이 구체적으로 기술된 보건소는 약 1/3에 불과하다고 보고한 바 있다.
Whitehead [11]는 유럽 국가들의 건강불평등 연구와 정책 동향들을 검토한 후 진전 단계를 도식화하여 제시한 바 있다(Figure 3). 이러한 단계들은 순차적으로 저절로 진전되는 것이 아니며, 각 사회들의 정치적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단계를 뛰어넘어 보다 높은 수준의 정책이 실행되기도 하고 특정 단계에서 가로막혀 답보 상태에 머무를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 지난 20년 동안 적지 않은 실증 연구의 성과들이 축적되었고 전면적이지는 않지만 사회적 관심도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다. 하지만 선행연구들이 지적했듯[48], 측정과 인식 단계는 넘어섰지만 아직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현 단계는 건강불평등 완화를 위한 전향적인 정책 수립으로 이어지느냐, 혹은 심리적 장벽에 가로막힐 것이냐의 중대한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 건강불평등 완화정책의 과제
그렇다면 건강불평등 완화정책의 실질적 내용은 무엇이며, 어떠한 접근법을 취해야 할까? WHO CSDH [7]는 건강불평등 완화전략으로 크게 세 가지를 권고했다. 첫째, 일상의 생활조건을 개선하고, 둘째, 권력·금전·자원의 불평등한 분포를 개선하며, 셋째, 문제를 이해하고 측정하며 조치의 영향을 평가하라는 것이다. 이 중 첫 번째 권고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이야말로 불평등이 구체적으로 발생하고 경험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건강불평등 완화정책의 직접적인 표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즉 건강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살아가고, 일하며, 나이 들어가는 생애 전 과정에 걸쳐 일상생활의 조건들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생애과정과 장(場)이라는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세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1) 초기 아동기에 대한 적극적 투자를 통해 보다 평등하게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한다. 2) 건강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번성하는 거주환경을 건설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3) 공정한 고용 관계를 구축하고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만든다. 4) 전 생애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위험에 대처할 수 있도록 가족정책, 연금, 고용보험 등 보편적인 사회적 보호 조치를 취한다. 5) 보편적인 보건의료 서비스를 보장한다.
이러한 권고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측면의 경제·사회정책들을 연계해야 하며, 기존의 다양한 보건정책/사업들 또한 형평성의 틀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모든 정책에 건강을(Health in All Policies, HiAP)' 전략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구집단 건강에 기여할 잠재력이 높은 수평적이고 보완적인 정책 관련 전략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건강한 공공정책(healthy public policies),' '건강을 위한 부문 간 행동(inter-sectoral action for health)'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인구집단 건강이 단지 보건 영역 활동의 성과물이 아니라 상당한 정도로 생활환경을 비롯한 사회적·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며, 따라서 때로는 보건 이외 영역의 정책과 조치들에 의해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WHO는 물론 EU 차원에서도 이를 공식적인 건강전략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여러 국가들이 실제 사례들을 구축하고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12].
구체적인 실례를 소개하자면, 심혈관질환 역학 분야에서 가장 성공적인 중재사업들 중 하나인 핀란드의 North Karelia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심혈관질환을 감소시키기 위해 특별히 식이 변화에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통상적인 보건교육이나 캠페인을 넘어서 '건강한 선택이 쉬운 선택'이 되도록 하는 사회 환경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시범사업 5년의 성공적인 결과를 바탕으로 핀란드 전역의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핀란드 정부는 채소와 과일 섭취를 늘이고 동물성지방 섭취를 줄이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를테면 낙농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 유지방 섭취 증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진단 하에 보조금정책을 바꿈으로써 낙농산업이 스스로 낙농 방식과 우유의 지방함량, 돼지 도축 시의 몸무게 등을 변화시키도록 유도했다. 한편 버터는 핀란드 국내산이지만, 식물 생장에 부적합한 기후 특성 상 식물성 오일은 수입을 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캐놀라 오일의 국내 생산이 가능한 품종을 개발함으로써 시민들이 쉽게 자국산 식물성 오일을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다양한 식물성 스테롤 마가린을 직접 시험 개발하여 주변국으로 수출까지 하는 등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과일이 잘 자라기 어려운 핀란드의 자연 환경을 고려하여, Berry and Vegetable Project를 통해 토착종 야생 베리를 확인·보급함으로써 다수의 낙농 농가들이 베리 농사로 전환하기도 했다. 또한 1995년 EU 가입 이후에는 'EU 학교 우유급식 프로그램'이 핀란드의 저지방 우유 보급정책을 무위로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로비활동을 벌여 이를 막아내기도 했다. 이러한 다각적 노력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1972년 핀란드 인구의 90%가 빵에 버터를 발라 먹었다면, 2009년 그 인구는 5% 미만으로 줄어들었고, 1인당 버터 소비량은 1965년 18 kg에서 2005년 3 kg 미만으로 감소했다. 뿐만 아니라 1970년에는 거의 전무했던 조리용 식물성 오일의 사용이 2009년에는 약 50%에 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혈중 콜레스테롤 수준이 급속히 낮아지고, 연간 심혈관질환 사망률은 80%나 감소했다. 이러한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건강결정요인이 대부분 보건 이외의 부문에 의해 통제된다는 개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13]. 만일, 이렇게 건강한 선택이 쉬운 선택이 되도록 하는 노력 없이 통상적인 보건교육만 시행했더라면, 건강정보 획득과 이해 수준의 차이, 값비싼 건강식품에 대한 구매력의 차이에 의해 건강불평등이 심화되었음은 물론 그토록 광범위한 인구집단 전체의 건강 수준 향상을 가져오지 못했을 것이다.
WHO CSDH 보고서[7]가 출판된 지 1년이 지나 열린 세계보건총회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대한 조치를 통해 건강불평등을 감소시키자는 결의안 WHA62.14을 통과시켰다. 이는 WHO 회원국들이 보고서가 제시한 주요 원칙들에 대한 정치적 헌신을 통해 이를 국가적 의제로 삼아 건강불평등 완화에 나서며, 모든 정책에 건강형평성 이슈를 주류 화시킬 수 있도록 건강과 관련한 부문 간 조치들을 조율하고 관리할 것을 촉구했다[14]. 다른 분야의 정책들과 마찬가지로 건강불평등 정책들이 수립되고 실행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와 관련한 정치적 의지를 확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살펴보아도, 건강불평등을 주요 의제로 삼은 정당의 집권(예, 영국,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시), 혹은 정당과 정파를 초월한 사회적인 합의 도출(예, 네덜란드, 핀란드, 스웨덴)을 통해 포괄적인 건강불평등 전략들이 입안되고 실행에 옮겨질 수 있었다[815].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강불평등 정책 이슈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정부 의제의 우선순위에 올려놓을 것인가일 수도 있다는 Khang과 Lee[4]의 지적은 타당하다.
건강형평성 확보를 위한 정책제안
건강불평등은 인권적 가치로서의 건강권 침해일 뿐 아니라, 만일 방치된다면 이미 존재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유발하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사회통합의 저해는 물론, 한국사회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산성의 상실과 복지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소극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건강형평성 정책은 정부의 최우선적 관심의 대상이 될 필요가 있다. 건강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정부의 의제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무엇보다도 점차 악화되고 있는 사회 전반적인 불평등의 완화를 위한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은 날로 심화되어 경제개발협력기구 국가들 중에서도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비정규직으로 대변되는 취약한 노동시장과 불충분한 재분배 정책, 사회보장 프로그램들이 그 핵심 기여 요인이라 할 수 있다[16]. 이러한 상황은 만일 우리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건강불평등이 향후 더욱 심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WHO CSDH [7]의 권고에 따라 특히 초기 아동기에 대한 적극적 투자와 더불어 괜찮은 일자리와 작업장 안전보건을 확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생애 과정에 걸쳐 소득 보장과 의료보장을 비롯한 적절한 사회보장체계를 갖추는 것이 절실하다. 의료보장이 건강형평성 정책의 유일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불건강의 차별적인 여파를 예방함으로써 불평등의 악순환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둘째, WHO CSDH [7]의 총괄 권고가 지적했듯 건강불평등 현상에 대한 지속적 모니터링과 더불어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추가적 연구 지원이 절실하다. 이를테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격차가 지적되고 있지만[17], 구체적인 기전에 대한 연구는 미흡하다. 2011년 실시된 고진로 사회권 연구팀의 조사는 비정규직이 임금 수준 뿐 아니라 불편한 자세, 반복 작업, 무거운 물건 들기 등 인간공학적 문제를 겪는 비율이 정규직보다 높다는 결과를 보여준 바 있다. 심지어 비정규직 중에서도 취약한 일용직은 과반에 가까운 42.9%가 자신의 일이 건강에 해롭다고 응답했었다[18]. 이러한 결과로부터 우리는 비정규직의 축소라는 근본적 접근과 더불어 비정규직에 대한 안전보건 규제 강화가 필요함을 유추할 수 있다. 불평등 현상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발생과정에 초점을 둔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
한국 정부는 WHO의 권고와 세계보건총회 결의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현재의 HP2020을 HiAP 전략으로 재구성하고, 이상의 의제들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정책과 사업들에 건강, 건강형평성이라는 렌즈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결론
건강불평등은 그 자체로 건강권의 침해이면서, 만일 방치된다면 기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마저 악화시킬 수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재 한국의 건강불평등 완화 정책의 진전은 매우 미흡하다. 정부는 WHO의 권고와 세계보건총회 결의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현재의 HP2020을 HiAP 전략으로 재구성하고, 정책과 사업들에 건강, 건강형평성이라는 렌즈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Peer Reviewers' Commentary
본 논문은 전 세계 불평등의 심화와 함께 보건정책의 핵심으로 부각되고 있는 건강형평정책에 대하여 한국의 현 주소와 향후 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 적절하다. 필자들은 세계보건기구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위원회" 권고 등에 근거하여 한국의 건강형평정책은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도외시 하는 등 좁은 의미의 '보건의료정책' 또는 '질병정책' 에 국한되어 있음을 비판한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건강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때, 건강형평성은 당위론적이 아닌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모든 정책적 수준에서 건강을 고려하는 전략과 건강형평성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는 정부의 정치적 의지가 중요하다는 저자들의 지적은 선언적 측면이 없지는 않으나, 한국에서 건강형평정책이 뿌리 내리기 위한 핵심 과제라 할 수 있다
[정리: 편집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