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균값에 익숙해져 있다. 청소년 학업성취도, 일인당 국민소득, 기대여명, 흡연율 등 우리에게 익숙한 통계지표들은 국가 간 비교의 대상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자부심의 근거가 되거나 사회적 대응이 필요한 문제가 된다.
하지만 평균값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평균이 있으면 분포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중학생의 수학성적 평균값은 미국 중학생보다 높지만, 수학점수의 사회계층별 격차는 미국보다 크고, 최근 10년 간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1].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도는 주요 선진국 중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 10여 년 사이 크게 증가하였다[2]. 보건의료 지표도 예외가 아니다. 기대여명에서의 소득계층 간 차이는 매우 뚜렷하고[3], 흡연과 같은 주요 건강위험요인에서의 사회경제적 차이도 명료하다[2].
혹자는 차이가 불가피한 것이라고 할는지 모르겠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건강 수준, 건강위험요인, 보건의료 이용에서의 개인별 차이는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윤리적 문제, 공정성의 문제로 환원하기 어려운 다양한 요인에 의해 개인별 차이가 발생한다. 이들 요인 중에 우연의 요소도 매우 중요하다[4].
하지만 개인별 차이가 아닌 사회경제적 요인별 차이는 구조적이며 불공정하다. 우연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통해 사회경제적 요인에 따른 차이라는 필연이 구현된다. 건강 불평등의 주된 초점은 사회경제적 요인에 따른 건강수준, 건강위험요인, 보건의료에서의 차이이다. 건강불평등 특집에 실린 논문들은 우리나라에서 보건과 의료 지표에서의 사회경제적 차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준다[235].
건강불평등이 왜 문제냐고 반문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집단의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낮은 체중으로 태어나, 어려서 사고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고, 아동발달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으며, 담배를 일찍 배우지만 끊지를 잘 못하고, 불안정한 직장에서 좋지 않은 노동환경과 유해물질에 노출되며, 늙어서도 일찍 허약해지거나 거동이 불편해진다(이들 현상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연구된 내용이다). 이웃의 어린 아이들이 겪을 이와 같은 건강불평등을 아이들 탓으로 돌릴 수 있나? 건강불평등은 사회적 공정성의 문제이며 사회의 성숙도를 재는 잣대이다.
건강불평등 현상은 국민건강을 향상시킬 기회가 된다. 많은 선진국에서 사회적 격차를 줄이지 않고서는 건강수준의 평균값을 향상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높은 사회계층의 흡연율이 충분이 낮아졌지만 낮은 사회계층의 흡연율은 미미한 개선을 이루었을 때, 흡연율의 사회계층간 차이를 줄이는 정책은 궁극적으로 전체 인구집단의 흡연율 감소에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우리나라 자료에 의하면 남성에서 소득 4분위 간 기대여명의 격차는 6.2세(이 또한 저 추계된 것이다)인데[3], 최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남성에서 암 사망을 모두 제거하였을 때 획득 가능한 기대여명 증가분은 4.7세이다. 즉, 소득 4분위 군의 남성들에서 암 사망을 모두 제거하더라도 불평등은 여전히 남는다. 건강불평등의 크기는 매우 크고 심각한데, 이를 달리 말하면, 건강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을 통해 인구집단의 건강수준에 큰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
미국, 영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 정부에서 건강 수준 향상과 함께 건강불평등 완화를 국가 보건의 두 가지 총괄 목표로 삼는 이유는 이와 같은 윤리적, 보건학적 이유들 때문이다. 경제성장과 분배가 국가 경제의 양 날개라면, 건강수준 향상과 건강불평등 완화는 국민건강의 양 날개이다. 세계보건기구와 여러 선진국에서 적극적인 건강형평 정책을 수립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6]. 우리나라도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에서 건강수명의 연장과 함께 건강형평성 제고를 총괄 목표로 삼고 있다[7]. 하지만 특집 논문에서 지적하듯이 우리나라의 세부 건강형평 정책은 매우 미진한 것이 현실이다[7].
건강형평 정책에 관한 세계보건기구의 보고서나 여러 선진국의 경험들은 정치적 의지, 사회적 결정요인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지속적 건강불평등 모니터링 등을 강조한다[67]. 그렇다고 의사의 역할이 적다고 할 수는 없다. 환자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한 진료과정에서의 의식적, 무의식적 차별이 있다면[8],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부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특집 논문이 지적하듯이 진료과정, 지역사회 활동, 연구와 교육 활동, 정치참여 등 의사의 다양한 활동 영역에서 건강형평성을 제고할 수 있는 방법들이 존재한다[9]. 보건의료서비스 제공 및 이용에서의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사의 역할을 통해 건강형평 정책 및 프로그램의 모범을 만들 기회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출발점은 건강불평등에 대한 관심부터이다. 건강 및 보건의료 정책, 일반인과 환자의 건강 관련 행태, 의료서비스 제공과정 등에 걸쳐 형평성의 잣대로 문제를 바라보는 형평성 렌즈(equity lens)가 무엇보다 우선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