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List > J Korean Med Assoc > v.56(2) > 1042653

오 and Oh: 우리 사회는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

Abstract

Recent developments in medicine in our society have drawn attention to various phenomena related to death, such as brain death, cardiac death, vegetative death, euthanasia, death with dignity, near-death experiences, hospice, and suicide. The definition and conception of death is significant because its reductionist determination may bring about a denial or taboo of death and a certain limitation on the modes of life and death. As religious traditions like Christianity and Buddhism and life and death studies show, human death cannot and should not be explained by physical and biological criterion of death like brain death or cardiac death alone. In a society with such a reductionist definition of death there can be no space for a mature culture of death and only a colossal number of miserable deaths like suicide. Therefore, as Kübler Ross argues, death should be defined in terms of considering the continued existence of certain realities as to psyche, spirit, and the meaning of life beyond physical and biological aspects. The medical and legal approach to death is greatly incomplete and restricted in taking into account the physical and biological aspect of death. Thus, it is necessary to precisely and deeply reconsider the definition and understanding of death from a broader and more comprehensive perspective rather than concentrating solely on the physical and biological criterion of death such as brain death or cardiac death.

서론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의학의 발달에 따라 전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뇌사, 식물인간, 안락사, 존엄사, 임사체험, 호스피스, 그리고 자살문제 등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현상들이 주목받고 있다. 죽음 이해와 개념규정의 방향에 따라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나 터부 등을 야기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의 방식까지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므로, 죽음에 대한 개념정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죽음 정의라는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의학전문출판사 고려의학에서 발행한 '죽음의 정의'는 죽음과 뇌사의 개념이 일반 사회에 명확하게 수용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라면서, 죽음을 뇌사 중심으로 새롭게 정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1]. 또 하버드대학교 뇌사위원회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죽음 정의에 의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이전 보다 이식에 필요한 장기의 활력 조건이 크게 향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 비록 뇌는 죽었지만 다른 장기는 유용한 상태인 한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라고 말하면서 분명히 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2]."
인간이 어디 뇌만의 존재, 육체만의 존재인가? 죽음을 뇌사 위주, 육체 중심으로 정의해도 되는 것인가? 뇌 중심 죽음 정의에 의해 장기이식은 활성화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잘못된 죽음 정의에 의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이 물화(物化)되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어서 죽음 담론은 종교에서조차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고, 시신은 위생적으로 처리해야할 쓰레기로 전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윤리 전공 학자는 "우리가 정의하고 논의할 수 있는 영역은 육체적 죽음뿐"이라고 말한다[3]. "죽음이란 무엇일까? (...) 우리의 이성으로는 사후의 생명에 관련된 죽음의 체험에 도대체 아무런 증명도 할 수 없다는 칸트의 판단은 철학적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 사후의 생명에 관한 증명은 그리하여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전혀 불가능하다. (...) 의학을 통해서도 혹은 종교를 통해서도 죽음이란 육체적 지속성이 끝나고 생명이 돌이킬 수 없이 소멸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4]."
육체의 소멸로 죽음을 말하는 것은 의학자가 할 일이다. 그의 주장대로 우리가 정의하고 논의할 수 있는 영역은 육체적 죽음뿐이라면, 우리 사회에 의학 이외에, 종교나 생명윤리 혹은 생사학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생명윤리' 용어에서 '생명'이 육체를 뜻하는 것인가? 생명윤리 전공학자의 말대로 육체의 소멸이라는 말로 죽음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면, 생명윤리는 '육체의 윤리'로 바꾸어 부르는 게 합당할 것이다.
우리가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죽으면 다 끝난다고 전제하는 뇌사와 심폐사처럼 육체중심의 죽음이해로 인해 우리 사회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1)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중 자살률 1위와 자살예비군 양산: 인간은 육체만의 존재이고 죽으면 다 끝나므로, 자살하면 고통 역시 끝난다는 오해가 사회에 만연해 있다. 이제 자살은 우리 사회를 읽는 코드가 되었다. 2) 안락사와 존엄사 논란: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죽음을 학교교육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으므로 죽음은 입에 올리기 꺼리는 터부가 되었고, 사전의료의향서 준비를 비롯하여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3) 호스피스 기피: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어서 호스피스가 활성화되기 어렵고 편안하게 임종하는 사람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4) 죽음의 질 심각: 육체가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죽음준비교육을 실시하고 있지 않으므로 죽음이 질이 좋을 수 없고 불행한 임종만 양산되고 있다. 삶을 편안하고 여유 있게 마무리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5) 삶의 질과 행복 만족도 세계 하위권: 죽음의 질이 좋지 않으므로 삶의 질 역시 좋을 수 없고 행복 만족도 역시 개선되기 어렵다. 죽음의 질 향상 없이 자살예방하기 어렵고 삶의 질 향상 기대할 수 없다.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개념 정의하느냐 하는 죽음 정의 문제는 죽음 판정의 육체적 기준과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개념이 서로 혼동되고 있다. 심폐사와 뇌사가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일 뿐이므로 의학적 죽음이해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죽음정의가 될 수 없다. 죽음정의는 육체의 죽음에 한정시켜 규정해서는 안된다. 죽음정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철학이나 종교, 혹은 생사학이 다룰 문제이고, 죽음 판정의 육체적 기준 제시는 기본적으로 의학적인 문제이므로, 둘을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기독교와 불교의 죽음 이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종말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으로,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희망의 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인 채 죽임을 당했지만 죽음으로부터 초월해 부활한 것처럼, 사후에 천국에서 먼저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나고, 신의 무한한 사랑에 감싸인 채 삶을 계속 이어가리라는 희망이 기독교 신앙의 근저에 있다. 성경은 죽음에 관해 체념조의 우울한 언어가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인도의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니르말 흐리다이'를 지었던 데레사 수녀는 누구보다도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보살핀 분이다. "죽음은 삶의 계속이고 완성이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일 뿐이지 영혼은 계속 유지된다[5]."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신학자 존 크리소스톰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는다는 것은 단지 옷을 벗는 것이다. 육체는 영혼의 옷이다. 임종의 순간 이것을 벗어놓은 후 우리는 보다 빛나는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6]."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유한성을 상징하는 생물학적 사건만이 아니라 인격적 사건이고 희망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도 달라이 라마가 "죽음이란 육신의 옷을 벗는 행위”라고 말하듯이 죽음을 육신이란 옷을 벗는 일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2003년 입적한 청화스님도 영혼이 우리 중생의 제한된 육안에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 존재하는 생명이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 중생들의 눈에는 안보인다 하더라도, 영혼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천도법어를 듣고 있다. 영혼은 육신과 함께 죽는 게 아니다[6]." 최근 입적한 법정스님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신을 70, 80년 끌고 다니면 부품 교체가 아니라 폐차 처분할 때가 있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육신의 죽음을 끝이라고 보면 막막하게 되지만,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어떤 희망이나 기대를 하게 된다[7]." 죽기 하루 전날 병상에서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 소원은 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하루빨리 다비장 장작으로 올라가는 것이야[8]!"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에도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인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 손으로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 (...)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9]."

티베트의 죽음 이해

'티베트 사자의 서'는 사람이 죽어갈 때, 혹은 죽은 이후 그를 위해 읽어주는 책이다. 티베트인들은 죽은 사람의 시신 옆에서 귀에 대고 이 책을 읽어준다. "이제 죽음이라 불리는 것이 그대에게 찾아왔다. 그대는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 그대는 지금 사후세계에 있다[10]." '바르도(bardo)' 개념은 티베트인의 생사관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다. '바르도'의 '바르'는 '사이', '도'는 '매달린,' '던져진'을 뜻한다. 바르도란 하나의 상황에서 다른 상황의 시작 사이에 걸쳐있는 '과도기,' '틈'을 뜻한다. 인간은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있는 과정적 존재라는 뜻이다. 티베트인은 바르도를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삶, 둘째, 죽어가는 과정, 셋째, 죽음 이후, 넷째, 새로운 삶이라는 4가지 바르도이다. 바르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삶만이 아니라 임종과정, 죽음 이후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삶까지 포괄하고 있다. 4가지 바르도에 비추어볼 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말은 더 이상 재론할 필요없고, 뇌사 중심의 죽음이해가 얼마나 피상적인지 두 말할 나위조차 없다.
티베트 바르도 가르침은, 우리가 미리 죽음을 준비할 때 일어나는 일과,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채 닥치는 일의 차이를 명확하게 제시해준다. 우리가 살아있는 지금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을 통해, 죽음의 순간, 그리고 죽음 이후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바로 지금 이 삶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지금 이 삶은 세속적 기준에 좌우되어 황폐해지게 되므로, 삶을 온전하게 충분히 살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 육신, 바로 거기에 갇혀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생사학의 죽음 이해

인도 뉴델리 태생의 하버드대학교 의학박사 출신으로 인도 전통 치유과학인 아유르 베다와 현대 의학을 접목한 디팩 쵸프라는 육체적 생명을 끝내는 것이 곧 죽음이라는 식으로 죽음을 정의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의식의 영역을 보다 확장시켜야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죽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이 우리 삶의 목적이며 그 완성이라는 증거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의식경계를 확장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과 죽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11]." 그러므로 죽은 이후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증명이나 논증의 문제라기보다, 우리가 지금 이 삶에서 자기 자신과 인간 존재를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요구할 게 아니다. 죽음 정의 문제, 혹은 죽으면 다 끝나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은 육체만의 존재인가 하는 질문과 직결되므로, 자기 자신은 육체만의 존재인지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게 바람직하다. 죽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핵심 포인트, 결국 자기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생사학을 창시한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도 인간 존재는 육체적, 감정적, 지적, 영적인 4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면서, "문제의 뿌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의 정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2]. 의사인 그가 이 일을 시작할 때에는 죽음 뒤의 삶에 관심도 없었고, 죽음 정의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죽음을 과학적으로 논의할 때에는 육체의 죽음에 대해서만 다룰 뿐이지만, 그는 죽음에 대해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는 일에 부딪혀 보기로 결정했다. 평생 동안 죽어가는 사람을 보살피고 죽음을 연구했던 그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 사실의 문제"라는 결론을 얻었다. 육체란 단지 우리가 죽음을 겪을 때까지 일정 기간 머무르는 집에 지나지 않으니까, 죽음은 단지 이 삶으로부터 다른 존재로의 변화일 뿐이므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12].

평온한 죽음과 아름다운 마무리

어떤 60대 남성이 처음에는 식중독 비슷한 증세였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뇌출혈과 심한 폐렴 증상이 있고 신장과 간 기능이 많이 떨어져 위독한 상태로 며칠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신건강 전문의사로 최면치료 전문가이기도 한 김영우 박사의 책을 좋아했던 아버지를 위해, 딸이 고심 끝에 김 박사에게 전화해 부탁했다. "중환자실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 말씀을 해달라.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해도, 남아있는 가족은 모두 잘 지낼테니까, 더 이상 염려마시고 편안히 눈을 감으시라고[13]."
김 박사가 고심 끝에 저녁 모임에서 일찍 빠져나와 밤 10시가 넘어 대학병원 중환자실을 찾아 그의 머리맡으로 다가가 귀엣말을 하듯 속삭였다. "제 말이 잘 들리고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면 눈을 한번 떴다 감아보세요." 그는 눈을 한번 가늘게 떴다가 감았다.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으신다면, 지금의 이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 가족과 헤어진다 해도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고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소멸되지 않는 영혼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제 말에 공감할 수 있고 어떤 결과도 편안히 수용할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눈을 떴다 감아보세요." 쇠약한 그가 알아듣기 힘들 것 같아 김 박사는 몸을 구부려 천천히 한 마디씩 분명하게 발음했다.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눈을 가늘게 떴다 감았다. 그로부터 3일 뒤 딸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어제 아버지가 운명하셨습니다. 주무시다가 편안한 얼굴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전혀 고통스럽지 않아 보였습니다. 박사님 다녀가신 이후 훨씬 안정된 모습으로 지내셨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신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13]."
미국의 스코트 니어링, 그의 마지막 순간은 평온하고도 위엄을 갖춘 죽음이었다. 그는 1963년에 '주위 사람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글을 처음 썼다. "나는 죽음이 진행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느끼고 싶다. 어떤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 없다. (...) 나는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왔으므로, 기쁘게 또 희망찬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다. 죽음은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것 혹은 깨어남이다." 죽기 한 달 전, 또 100살 되기 한 달 전의 어느 날 그는 "더 이상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맑은 의식을 지니고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그는 신중하게 여행 떠날 시간과 방법을 선택했다. 음식 섭취를 중단함으로써 서서히, 품위 있게, 그리고 평화롭게 육신의 옷을 벗고자 했다. 그는 이 무렵 "기쁘게 살았으니 기쁘게 죽으리라. 나는 내 의지로 나를 떠난다."는 말을 즐겨했다. 아내 헬렌은 스코트의 뜻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1983년 8월 24일 아침, 천천히, 천천히 그는 자기 육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점점 약하게 숨을 쉬더니, 마치 마른 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숨을 멈추었다. 그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시험하듯이 "좋아." 하면서 마지막 숨을 쉬고 떠나갔다. 헬렌은 스코트가 보이지 않는 세계로 옮겨갔음을 느꼈다[14].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철학적으로 산다'는 것은 재물이나 권력, 명예 등 세속적 가치가 아닌 진리나 지혜,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는 것을 말한다. '철학'이란 잠자고 있는 영혼을 깨워 무지를 자각하게 하여, 스스로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죽음을 절망 혹은 두려움 자체라고 간주한다. 그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죽음에 임해 담담하게 죽을 수 있었던 것은, 죽음에 대해 자기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무지를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델포이 신전의 경구 "너 자신을 알라"는 인간의 앎이 보잘 것 없음을, 우리가 제대로 아는 것이 없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는 뜻이다. "지금 죽어서 온갖 수고로움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이 최선임을 명확히 알고 있다"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는 담담하게 여행을 떠났다. 깨어 있는 영혼은 삶에만 집착하지도 않고 죽음을 절망이라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죽음은 두려운 현상도, 절망 그 자체도, 아무것도 없는 끝도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한 죽음은 다만 여유 있게 받아들여야 할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다[14].

결론

종양학 전문의사로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 있는 로저 콜, 시신을 검사하는 동안 육신을 떠난 영혼의 존재를 생생하게 체험한 그는 죽음을 더 이상 현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우리 인식의 한계를 반영할 따름이기 때문이다[15]. "영혼의 존재증명은 무의미하다. 인간 자체가 영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의 집합체이다. 영혼의 존재는 굳이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임종의 순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16]." 여러 측면에서의 연구 결과를 통해 볼 때, 죽음은 꽉 막힌 벽이 아니라 열린 문으로서,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라면서 정현채 교수는 "우리가 죽음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재수 없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고 마지막 성장의 기회이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라는 관점을 수립해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17].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뇌사나 심폐사처럼 죽음 판정의 육체적 기준만으로 설명될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육체 중심의 죽음 판정 기준이 죽음 정의를 대신하는 그런 사회는 바로 우리 사회가 그렇듯이, 결코 죽음 문화가 성숙될 수 없고 자살처럼 불행한 죽음만 양산될 뿐이다. 이제 죽음 정의는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것을 넘어 영혼, 정신, 삶의 의미같이 순전히 물질적인 삶과 생존 이상의 무언가 지속되는 것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고 퀴블러 로스는 말한다[18]. 의학적, 법적인 접근은 단지 죽음의 육체적 측면, 즉 죽음 전체를 보지 않고 일부분만 다루는 격이다. 뇌사 혹은 심폐사처럼 죽음 판정의 육체적 기준 제시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보다 큰 틀에서 죽음 정의 문제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차분히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Peer Reviewers' Commentary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중의 한 분인 미국의 정신과의사 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많은 환자의 임종을 지킨 임상 경험을 통해 "인간의 육신은 영혼 불멸의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일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필자는 십수 년 전부터 대학에서의 체계화된 죽음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의 자살예방교육을 효과적으로 이루어내고 있다. 유물론에 입각한 현대과학교육을 받은 의사들은 이러한 죽음관에 생소하겠으나, 이미 선진국에서는 임사체험 등에 대한 여러 병원에서의 다기관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일부는 Lancet과 같은 유서 깊고 지명도가 높은 의학학술지에 게재된 바도 있다.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육체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비육체적인 부분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때, 의료현장에서 환자를 대하는 의료진의 태도에 큰 변화를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심각한 사회문제인 자살률 감소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정리: 편집위원회]

Acknowledgement

This work was supported by Hallym University Research Fund (HRF-20110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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